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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을 통해 본 전조선-후조선, 그리고 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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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2편으로 나뉘어 있던 글을 통합하고 좀 더 다듬어서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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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은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입니다. 이 두개의 문헌을 통해서 전조선-후조선-위만조선에 대해서 어떤 가설을 세울 수 있는지 보겠습니다. 중국 사료들은 고조선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후조선의 마지막 왕과 위만조선에 대한 기사만 있으므로 일단 제쳐 놓겠습니다.

먼저 삼국유사를 보면,

1.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에 단군왕검(壇君王儉)이 있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였다. 나라를 개창하여 조선(朝鮮)이라 했으니 고[高-요임금-]와 같은 시대이다.”

2.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庶子)인 환웅(桓雄)이 천하(天下)에 자주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보니 인간(人間)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며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웅(雄)이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정상 신단수 밑에 내려와 신시(神市)라 하고 이에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하였다.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穀)·명(命)·병(病)·형(刑)·선악(善惡) 등 무릇 인간의 삼백육십여 가지의 일을 주관하며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 [웅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당(唐)의 고(高)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庚寅)으로,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하였다. 또 도읍을 백악산아사달에 옮겼는데, 궁(弓)홀산(忽山)이라고도 하며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그 후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의 호왕(虎王-武王)이 즉위한 기묘(己卯)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곧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 산신(山神)이 되었으니 수(壽)가 1,908세다."라고 하였다.

3. 당의 ≪배구전(裵矩傳)≫에 이르기를 “고려(高麗)는 본시 고죽국(孤竹國)인데 주(周)가 기자(箕子)를 봉하고 조선이라 하였다. 한(漢)이 3군(郡)으로 나누었으니, 현토(玄菟)·낙랑(樂浪)·대방(帶方) 북대방(北帶方)이다.”라고 하였으며, ≪통전(通典)≫에도 역시 이 설명과 같다.

4. ...(생략)...

삼국유사에는 총 4건의 고조선 관련 기사가 실려있습니다. 위의 1,2번은 전조선에 관한 기사이며, 3번은 앞 문장은 후조선, 뒷 문장은 위만조선에 관한 기사이며, 4번째는 여기에 옮기지는 않았지만 위만조선 관련 기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고조선에 대해서만 분석하고자 하니 1,2번 기사만 대상으로 하겠습니다.

1번 기사는 단순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약 2천년전에 단군왕검이 나라를 열고, 국명은 조선, 도읍은 아사달로 정했다." 다만, 여기서 2천년전의 기준이 되는 시점이 언제인지가 모호한데, 이 기사를 가져온 ≪위서≫라는 책의 정체와 책이 쓰여진 시점이 불명확합니다. 따라서 이 기사는 무시하고, 더 자세한 내용을 가진 2번 기사를 중심으로 보겠습니다. 2번 기사에는 아래와 같이 2개의 국가가 등장합니다.

1) 신시

- 한민족 이전의 국가, 왕은 환웅, 위치는 태백산 부근

- 건국 시기 불명, 수도는 별도로 없음. 도시국가로 추정.

- 국가 운영 철학: 홍익인간, 재세이화

2) 조선

- 한민족 최초의 국가, 왕은 단군, 강역은 불명

- 건국 시기는 기원전 2350~기원전2300년경 : 경인년의 정확한 연도는 불명확하므로 대략적인 시기로 산정

- 수도는 평양성 - 백악산아사달 - 장당경 (4번째 천도지인 아사달은 2번 백악산아사달과 동일한 장소로 보이며 국가 멸망 또는 흡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됨)

- 지속기간 1,908년 (백악산아사달에서만 1,500년 존속) - 1,908년은 단군의 수명이라기 보다는 고조선 정치세력의 존속기간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

신시는 아무래도 신화적인 요소로 가득차 있고 단군이 환웅의 장자인데 따로 개국을 하는 것도 우리 역사상 전례 없는 일이니, 상징적인 기사로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고조선 건국, 3개의 수도와 1,908년의 존립 기간만이 의미 있는 사실로 보입니다.

수도의 위치는 나중에 보기로 하고, 먼저 어느 시기에 왜 천도 했을까만 살펴보겠습니다.

고조선의 존속기간인 기원전 2,300년경~기원전 400년경 사이에는 인류사상 2가지의 큰 변화가 있습니다. 첫째는 청동기의 등장, 두번째는 철기의 등장입니다. 저는 고조선의 2번의 천도가 이와 연관이 있을거라고 봅니다.

먼저 고조선 최초의 천도(평양성 -≫ 백악산아사달)는 동북아시아 청동기의 등장과 동일 시기로 보여지는데, B.C.2300년경 건국 후 약 300년이 지난 B.C.2000년경에 천도하고 청동기 문화를 꽃피웠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 1,500년이 지난 B.C.500년경은 철기의 등장과 함께 비파형동검이 후기형으로 변화하는 시기이니 2번째 천도 (백악산아사달 -≫ 장당경)의 이유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동북아의 청동기가 자생적으로 발생했을 것으로 보는 학자들의 의견을 감안하면 첫번째 천도는 고조선이 주도적으로 진행했을 가능성이 크고, 두번째 천도는 외부의 충격 (철기의 도래)에 의해 진행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후한서≫에서 언급한 '기자의 후손이 자칭 왕을 칭했다'는 시점이 이때(기원전 500년경)가 아닐까 생각되네요.

기사 본문의 "주(周)의 호왕(虎王-武王)이 즉위한 기묘(己卯)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라는 부분에서 주 무왕이 등장하는 연대와 아사달에서 보낸 1,500년이라는 시간은 서로 배치되기 때문에, 해당 시점으로 이해할게 아니라 기자 전설과 관련된 집단으로 인해 2번째 천도가 진행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합니다.

정리하면 전조선은 B.C.2300년경 건국하여 평양성(위치 불명)에 도읍하였고, 300년 후인 B.C.2000년경 청동기 문화의 시작과 함께 어떤 계기로 백악산아사달(위치 불명)로 천도 후 1500년을 지내다가, 철기시대의 도래와 함께 아사달을 기자와 관련 있는 신흥세력에게 내어주고 장당경(위치 불명)으로 천도, 100년 후인 B.C.400년경에 멸망 또는 신흥세력에게 흡수된 것으로 이해됩니다.

기자와 관련되고 기원전 500년경에 등장하여 전조선을 밀어낼 수 있는 신흥세력이라면 '후조선' 인데, 후조선은 기자와 관련되어 있으니 고조선의 서쪽에 있었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후조선에 밀려난 고조선이 이동한 장당경은 아마도 기존 수도의 동쪽었을거라 생각하는데, 후조선 세력이 서쪽에서 왔기 때문에 그렇게 추정합니다.

다음은 제왕운기입니다.

제왕운기 권하

요동(遼東)에 따로 하나의 천하[乾坤]가 있었으니, 돌연히 중국[中朝]과 구분되어 나뉘었네.

...

처음에 누가 나라를 세워 세상을 열었는가? 석제(釋帝)의 자손으로 이름은 단군(檀君)이라네. 요(堯)임금과 함께 무진년에 나라를 세워 순(舜) 임금 때를 지나 하(夏)나라 때까지 왕위에 계셨도다.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년에 아사달 산으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네. 나라를 다스린 지가 1,028년으로, 어찌 변화시켜 환인께 전할 것이 없었겠는가? 그 뒤 164년 만에 어진 사람이 다시 군신(君臣)관계를 다시 열었도다.

후조선(後朝鮮)의 시조는 기자(箕子)인데, 주(周) 무왕(武王) 원년인 기묘년 봄에, 이곳으로 도망하여 와 스스로 나라를 세웠으니, 주 무왕이 멀리 떨어진 봉토(封土)에 조서(詔書)를 내리셨네. 예로써 사례하지 않을 수 없어 찾아가 뵈니, 홍범구주(洪範九疇)로 인륜을 물으셨네. 41대손은 준(準)이라 부르는데, 다른 사람에게 침탈을 당하여 백성이 떠났도다. 928년을 다스렸으니 〈기자의〉 유풍(遺風)이 아름답고 도탑게 전하였다네. 준왕이 금마군(金馬郡)에 이주하여 도읍을 세우고 또 다시 능히 인군(人君)이 되었도다.

한(漢)의 장수 위만(衛滿)이 연(燕)에서 태어났으니, 한 고조(高祖) 12년(BC.195) 병오년이라네. 준왕(準王)을 공격하여 쫓아내고 나라를 빼앗으니, 손자 우거왕(右渠王) 때에 이르러서는 그의 허물이 가득차게 되었도다. 한 무제(武帝) 원봉(元封) 3년(BC.108) 계유년에 장차 군사들을 내어 토벌하게 하였네. 3대에 걸쳐 모두 88년이 되니, 한을 배반하고 준왕을 내쫓았으므로 재앙을 입어 마땅하도다.

제왕운기는 전조선의 건국시기를 요임금과 같은 무진년으로 보지만, 요임금의 실존여부나 간지의 불확실성 때문에 이 연도는 불명확합니다. 그리고 비슷한 이유로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년", "주(周) 무왕(武王) 원년인 기묘년 봄" 등의 정보는 일단 무시하겠습니다. (위만이 태어난 날짜를 "한고조 12년 병오년"으로 표기한 것도 오류로 보입니다.)

그러면 상대 연대들이 남는데, 단군이 나라를 다스린지 1,028년, "164년만에 어진 사람"이 나타난 것, 기자의 후손이 928년을 다스린 것이 그것입니다. 이 '어진 사람'을 '기자'로 해석하고 이 연도들이 연속적인 것이라 가정한다면 전조선은 B.C.2315년, 후조선은 B.C.1123년에 건국한 것이 됩니다. (1,028년(전조선) +164년(혼란기) +928년(후조선) +B.C.195년(위만조선 건국) = B.C.2315년)

삼국유사와 비교해 보면 전조선-후조선-위만조선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동일하지만 전조선의 존속기간이 다르고, B.C.13~12세기 사이에 164년간 혼란기가 있었다는 내용이 새롭게 나옵니다. 전조선의 존속기간은 고고학 증거를 감안할 때 삼국사기가 더 신뢰할 만합니다. 따라서 전조선의 지속기간은 삼국사기를 채택합니다. 즉, 700여년간 전조선과 후조선이 병행한 것으로 보는데, 아마도 후조선은 고조선의 거수국(?)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B.C.6세기경에 거수국이 본국을 접수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B.C.13~12세기는 비파형 동검이 처음 등장하는 시기와 유사하니 그렇다면 혼란기이자 전쟁의 시기로 이해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시기의 차이는 있지만 단군이 아사달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는 표현은 삼국유사와 동일하네요.

제왕운기에서는 전조선-후조선의 계승이 순차적이며 평화적인 성격으로 보여지는데, 약간의 마찰이 있었던 것처럼 표현된 삼국유사와는 뉘앙스에 차이가 있습니다.

제왕운기는 기자조선을 후조선이라 부르며 정통성 있는 국가로 인정하고 있는데 반해, 위만조선은 경멸하는 투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국 기록을 보면 위만조선 초기에는 진번, 임둔 지역도 장악하지 못한 것으로 나오는데, 즉 B.C.195년에 후조선이 해체되고 위만조선을 포함한 열국시대로 접어 들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정리하면 후조선은 기원전 12세기경에 성립(위치 불명)했고, 초기에는 고조선의 거수국(?)이었으나 기원전 500년경 고조선을 밀어내고 아사달을 차지한 후 어느 시점에 왕으로 칭했다고 보여집니다.

위만조선은 초기철기시대에 해당하니 일단은 전조선과 후조선만 가설을 세우겠습니다.

가설을 최종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고대 조선은 전조선-후조선-위만조선의 3개의 정치체가 연속됨

2. 전조선의 연혁

  a. B.C.24세기 후반, 평양성에서 건국

  b. B.C.21세기 청동기문화의 시작과 함께 백악산아사달로 천도

  c. B.C.6세기 후조선에게 밀려 장당경으로 천도

  d. B.C.5세기 후조선에 흡수 (멸망)

3. 후조선 연혁

  a. B.C.12세기경 고조선의 서쪽에서 세력 성립

  b. B.C.6세기경 세력이 성장하여 동진, 고조선의 중심지 백악산아사달 접수

이 가설이 고고학으로 증명되는지, 그 강역과 중심지를 특정할 수 있는지 다음 글에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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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6

울티마툴레님의 댓글

가설검증이전에 사료비판 측면에서 시대구분을 재고하셨으면 합니다. 후조선이란 명칭은 없다고봅니다.
1)단군조선은 대릉하ㅡ요하사이에서 일어나 난하유역으로 진출해서 하북지방과 산동지방을 손에 넣었다가 2)고대중국족의 성장으로 다시 난하유역으로 후퇴하고 변경방비를 화북지방 유이민에게  맡겼다가 3)위만정권의 성장으로 인해 요동과 요동반도로 이동하였고 4)다시 서북한지역으로 이동해서 소멸되었다고 봅니다
이과정에서 한국사는
단군조선ㅡ부여/진국시대ㅡ열국시대ㅡ부여/고구려/백제/신라/가야 5국시대ㅡ신라/발해시대ㅡ고려시대ㅡ조선시대 이런식으로 시대구분해 봅니다.
여기서 백제는 삼한 중 마한의 별칭으로서 진국이 남하하여 마한진한변한 삼한체체로 분열되었다가 마한 목지국 주도로 통일된 나라를 백제라 칭했습니다. 이 백제는 광개토왕의 침략으로 멸망하고 잔존세력이 일본으로 도주하여 본토의 백제(영산강세력)와 일본열도의 왜로 양분되어 존재하다가 개로왕 전사후 일본열도의 왜가 귀향하여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후기 백제를 성립시켰다고 봅니다.

울티마툴레님의 댓글

단군조선의 시대구분만 국한해서 다시 살펴보면
주의 건국과 춘추시대 개시이전에 고대중국족은 태행산맥을 넘지 못했으며 태행산맥 서쪽에 머물렀습니다. 춘추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고대중국족은 단군조선의 영향력하에 있던 태행산맥 동쪽 동이족 영역으로 확장을 개시했고 인구를 무기로 드뎌 황하하류까지 확장했습니다.
이에 따라 단군조선의 경계선은 다시 난하유역으로 후퇴하였고 왕검성이 있던 난하유역의 조선현은 비워지고 대릉하와 요하사이의 왕검성으로 재천도한 것이죠. 그리고는 왕검성이 있던 조선현을 중심지로 한 변방경계를 상주교체기에 하북성으로 이주한 기자일족에게 맡겼을 뿐입니다.  이를 주의 무왕이 기자를 조선현에 봉했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울티마툴레님의 댓글

이때가 bc10세기경으로 아직 청동기에서 철기로 이동하기 직전이라 정치사회적 변동은 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철기의 보급이 본격화되면서 고대중국에서는 전국시대가 개시되고 단군조선내에서도 철기가 보급되면서 단군조선도 분열되기 시작하면서 열국시대가 개시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잘 표현한 자료가 바로 환단고기의 북부여전입니다. 이미 단군체제ㅡ누층적읍제봉건국가ㅡ는 붕괴되기 시작하였고 북부여 진번 임둔 준왕정권 등 여러 세력들을 필두로 약 400여년간의 열국시대가 개시되었습니다. 문제는 이때 진한교체기여서 수많은 유이민이 난하로 밀려들었고 자준정권도 강화되었습니다. 이에 스스로 왕을 칭하였으며 이는 단군조선의 붕괴를 방증하는 예입니다. 하지만 아직 단군조선은 이름을 달리하며(대부여) 요하 동서 유역에 명맥을 유지했으나 위만정권의 출범으로 요하동쪽으로 이동하며 이름을 바꿔 진국을 성립시켰습니다. 위만정권은 세력을 더 넓혀 요하까지 이르렀으며 단군조선은 더욱더 유명무실해졌습니다

울티마툴레님의 댓글

이에 과거 단군조선의 누층적 읍제봉건체제 우리말로 담로제는 무너졌고 진국마져 한반도남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만주일대는 고대한국족이 만든 각종 지역기반국가와 한사군이 얽힌 전쟁터가 되었고 사방에서 유이민들이 발생하여 이들이 지속적으로 한반도로 유입되었습니다.
이에 대동강 유역을 낙랑국이 성립하고 예성강 이남으로는 남하한 진국이 분열하여 마한 변한 진한이 성립했습니다. 분열한 이유는 중심이 될 단군왕가가 묘향산근처에 머물며 더이상 남하하지 않아서입니다.

울티마툴레님의 댓글의 댓글

논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여러가설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이승휴식으로 하던 일연식으로 하던 어차피 사료부족이니까요. 다만 제가 문제삼는건 준왕조선의 성립근거로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것을 근거로 삼는 이승휴설은 문제 있다는 것입니다
기자일족이 나라를 세웠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으며 난하유역에 조선현이 있었으며 거기에 왕검섬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주 무왕시절 조선현은 조선으로 불렸을 겁니다. 그렇다고 조선현이 조선전체는 아니죠.
그래서 제 상상은 주무왕은 주나라와 단군조선의 경계에  완충지대를 설정하고 기자일족의 지배를 인정했고 단군조선은 고대중국족의 세력확장 최전방저지선으로 기자일족을 이용하여 난하유역에 기자족의 정주를 허락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우리고대사의 주류로 나설수 없다고 봅니다.

흥무대왕님의 댓글의 댓글

그렇군요. 먼저 제가 하는 작업을 설명 드려야겠네요.

고조선-후조선-위만조선에 대한 문헌이 빈약하여 그동안 고고학계에서도 유물 해석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조선-후조선에 대해 기록된 소수의 문헌인 <삼국유사><제왕운기>에 기초 해 가설을 수립하고, 이 가설을 고고학 증거들과 매칭 시키는 작업을 하는 중입니다.  일단 이 작업을 지켜보고, 이해하고, 그 후에 피드백을 주시는 게 어떨까요?

제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아닌지는 아직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난 일년간 읽은 수많은 책들(통설, 소고조선론, 대고조선론, 대륙고조선론)이 모두 헛점을 보이고 있어서, 이럴 바엔 차라리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진행하는 중입니다.

상식과 합리성에 기반하고, 과학적 접근법을 통해서 역사를 탐구하자는 것이 울티마툴레님과 제가 공감한 신조가 아니었나요?

최근 님이 올리시는 글은 역사를 학문이 아닌 종교의 수준으로 끌어올리시는 듯 하여 심히 우려됩니다.

증거에 기반하여 스스로 검증해 보시길 권합니다.

흥무대왕님의 댓글의 댓글

제 글을 잘못 이해하셨네요.
저는 기자와 우리 민족은 관련이 없다고 봅니다. 다만 기자가 나타난 시기를 이용해 후조선의 성립 시점을 추측 했을 뿐이죠. 게다가 나중에 올린 글을 보시면 알겠지만, 후조선의 성립 시기조차 고고학으로 입증이 되지 않아서 BC 10세기로 정정 했습니다.

울티마툴레님의 댓글

요약하자면
혼인동맹으로 기반으로 하는 담로제로 특징지어지는 단군조선의 누층적 읍제봉건국가는 철기의 본격적 보급 + 고대중국족의 성장이 겹치면서 bc5세기경부터 붕괴하기 시작하여 ad3세기경까지 잔존했습니다.
따라서 고대 한국사의 시대분류를 5세기까지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적통)
단군조선ㅡ대부여ㅡ진국ㅡ소멸
(방계)
대부여이후 각종부여/진국ㅡ부여/고구려/삼한/신라/낙랑국ㅡ고구려/백제/신라/가야
(혼합세력)
준왕정권ㅡ위만정권ㅡ낙랑군ㅡ대방군ㅡ소멸

흥무대왕님의 댓글의 댓글

음... 생각과는 조금 다른 반응이었습니다.

크게는 세 가지로 나뉘는데, 재미있다 / 고고학 해석이 잘못되었다 / 뭔 헛소리? 정도로 나눌 수 있겠네요.

1. 재미있게 봐주신 분들도 제법 있습니다. "좋아요"도 눌러주고, 힘든 작업 하느라 고생했다는 위로도 있고... 물론 이 주장을 모두 믿는 건 아니겠지만요.
2. 부흥카페는 고고학에 많은 관심이 없어서인지 고고학 자체로 반박하는 분은 드물었습니다. 한 분이 고고학으로 반박해 주셨는데, 해석의 차이인 듯 하여 크게 도움은 안되더군요.
3. 단군조선은 설화에 불과한데 뭔소리냐 하는 분들도 계셨지만, 고조선에 대한 문헌 자체가 적으니 문헌으로 반박은 못하는 듯 하고요, 그렇다고 딱히 고고학을 가지고 반박하는 것도 아니라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총평은, 부흥카페는 고고학에 대해서 크게 관심이 없어서인지 "재미있는 얘기네...?" 정도로 반응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하지만 증명이 불가하니 무시하는 느낌이었고요.

Marauder님의 댓글의 댓글

저역시도 관심도가 상대적으로 덜하니 어쩔 수 없죠. 관심을 가지려면 역시 주제가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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