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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무대왕님의 삼조선설에 반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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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무대왕님은 전조선ㅡ후조선ㅡ위만조선이라는 도식적인 사고방식을 제시하셨는데요. 두가지 측면에서 반대합니다. 


1. 중국측 선진시대자료와 한시대 사료들을 검토한 윤내현교수에 따르면 (1) 고조선의 국가단계진입은 늦어도 기원전20세기경이었으며 이는 상나라의 성립시기와 비슷하다란 점이고 (2)고조선의 강역에 대한 광범위한 검토를 통해(지금까지 제대로 사료비판을 한 한국중국학자들이 매우 드묾) 고조선은 요하유역에서 일어나(그전에 지금의 평양지역에서 일어났을수도 있으나 아직은 확인불가) 요동과 요서와 서북한과 북만주 지역으로 확장했고 명백히 국가단계에 진입했다는 점 (3)고조선강역에서 청동기가 이미 기원전24세기에 출현(하가점 하층문화)했다는 점 등을 종합해보면 기원전 20세기에 고조선은 이미 국가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또 고조선의 사회성격을 보면 읍들이 누층적으로 위계화된 읍제봉건국가임을 윤교수가 고증햇습니다. 언어학계의 연구에 의해 평양성과 아사달이 대읍 또는 도읍을 뜻하는 보통명사란계 밝혀졌습니다. 또 고조선은 강역상 황하유역에 거주하던 화하족과 난하를 경계로 활발히 교류하고 전쟁을 벌였던 나라였기에 사회발전단계도 비슷햇다고 하는 것에 무리가 없으며 서북한과 요동 길림 대릉하와 요하사이의 요서지역의 고고학적 발굴결과는 읍(도시)들이 소읍과 중읍과 대읍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상의 논거를 통해 고조선은 단군왕검의 개국이래 단군조선으로 명맥을 이어왔으며 누층적읍제봉건국가로서 노예 평민 귀족으로 이뤄진 사회였고 이 틀이 바뀌었다는 역사적 고고학적 증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심지어 고조선은 삼국지위지동이전에 따르면 소국이 형태로 유명무실하게 기원후 3세기까지 존재했습니다. 그러므로 전조선과 후조선으로 나누는 방식을 옳지않다고 생각합니다. 


대안으로 고조선시대와 열국시대로 시대구분하는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철기의 도입으로 전국시대의 대혼란이 찾아온 것처럼 고조선도 철기의 도입으로 인해 각 대읍들이 반독립적인 상태로 되었고 위만정권의 성립과 확장으로 인해 고조선왕실이 흔들리자 열국시대로 접어들었다고 보는게 맞다고 봅니다


2.윤교수는 기자신고를 통해 기원전10세기경 상나라 멸망후 기자일족이 주나라의 통치를 피해 북경부근으로 이주했음을 밝혔습니다. 그들의 청동기가 난하서부 북경인근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를 중국사서는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표현했고 중국사서는 기자가 봉해진 조선이 북경인근 창려의 조선현이라고 이미 주석해놨습니다. 


즉 기자일족은 주나라의 탄압을 피해 북경인근으로 이주했고 이후 진제국성립시 난하를 넘어 고조선으로 망명했습니다. 이에 고조선은 팽창하는 화하족에 대응해 수도를 장당경(대륙하중류 북진)으로 천도하고 변방수비를 제후국으로 인정한 기자국에 맡겼습니다. 


진한교체기에 기자국으로 망명한 위만은 준왕(정식명칭은 자준왕이며 기족의 성이 자씨임은 주지의 사실)을 배신하고 기자국을 탈취하여 위만정권을 세웠습니다.  국호를 조선으로 하였는데 이는 고조선이 중원으로의 확장을 위해 왕검성(임금이 살던 성) 즉 검독중 하나인 조선성이 있던 창려에 제2도읍을 세웠던 것을 다른 검독인 북진으로 천도하며 기자국에 내줬다가 위만이 이를 탈취하며 도읍했기 때문입니다.  즉 기자국과 위만은 모두 조선성에 도읍했으며 조선성은 북경인근 창려에 있었음이 중국사서를 통해 모두 입증됩니다. 


그러므로 준왕조선을 후조선으로 상정한 흥무님의 생각은 사서에 근거하지 않은 상상으로 봅니다


아무튼 기자국을 탈취한 위만은 서한의 외신이 되어 지금의 요하 서쪽을 빠르게 잠식해나갔으며 이에 붕괴단계에 있던 고조선은 도읍을 다시 요동의 심양남부의 검독으로 천도하였고 이후 진국 등 각종 나라들이 성립된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말해 위만정권과 고조선은 병립해있었고 위만정권에 의해 고조선이 대체된 적은 없었으며 관련 사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조선은 위만조선의 확장으로 인해 요동으로 철수하였으며 위만정권을 토벌한 서한과 요하를 경계로 하였을 뿐입니다. 이시기 고조선내부는 완전 붕괴하여 열국들이 들고일어나 영역국가로 전환되는 시기였습니다. 그러므로 국명을 단지 조선으로 했다하여 위만정권을 위만조선으로 보고 고조선을 대체했다는 흥무대왕님의 견해는 성립될 수없습니다


3.결어

흥무대왕님이 제시한 삼조선설ㅡ단군이 세운 전조선, 준왕일족의 후조선, 이를 탈취한 위만조선ㅡ은 사료나 고고학적 증거들로 뒤받침될 수없습니다. 


기후(기자족 제후)가 명시된 청동기가 난하유역에서 발견되나 극소수입니다. 이는 기자일족이 난하근방으로 망명해왔다는 증거일뿐입니다. 또 대륙하 인근에서 비슷한 청동기가 출토되었으나 이는 위만에게 쫏겨난 준왕일족이 남긴 유물일뿐입니다. 


또 고조선이 위만조선에게 멸망한 일이 없으며 단지 조선성에서 개국하여 조선이라고 자칭했을 뿐인 위만정권은 그저 서한의 외방정권이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삼조선설을 폐기하고 단군조선시대(청동기시대)ㅡ열국시대(철기시대)ㅡ오국시대(부여,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시대구분이 기원전20세기경부터 기원후1세기까지의 올바른 시대구분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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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울티마툴레님의 댓글

추가. 일연에 따르면 단군조선의 최초도읍지는 평양성인데 표현으로 보아 최초도읍지가 아닐수도 있습니다. 이는 확인불가능하며 아사달 혹은 평양의 한자어인 왕검성 혹은 검독(검터, 임금성)은 역사적으로 세군데 확인됩니다.

심양남부의 검독이 있고 대륙하 인근의 검독이 있으며 난하인근의 검독이 있습니다. 전 윤교수의 생각과 조금 달리해서 단군조선이 대륙하인근의 검독에서 개국하였으며 이후 난하인근 확장하며 그곳에 검독을 세웠다가 다시 대륙하인근의 검독으로 철수하고 이후 심양남부의 검독으로 가서 그 뒤 평양인근으로 가 소멸했다고 봅니다

단군조선이 난하인근까지 진출한 것은 아마도 상나라의 약탈에 시달리던 동이족 나라들의 구원요청에 따른 확장정책이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상족의 멸망후 주족의 회유책으로 동이족 상당수가 주나라에 귀복했기에 단군조선은 다시 요하 서부연안으로 후퇴한 것으로 보입니다. 변방수비는 망명한 기자일족의 기자국에 맡긴 것으로 보입니다.

흥무대왕님의 댓글

제 가설에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제 가설을 조금 오해하시는 부분도 있으니 간단히 요약하고, 본문글에 대해 답을 드리겠습니다.

1. 전조선
- 기원전 24세기~21세기 : 신석기시대이므로 언급하지 않음. 평양성의 위치도 알 수 없음. (단, 백두산 근처가 아닐까 추정 중)
- 기원전 20세기~12세기 : 청동기시대. 요북지역을 중심으로 세력 형성(마성자문화). 한반도와 중국동북지역 전역으로 문화 전파. 사회발전 단계는 "위계사회-분절사회" 정도로 보여짐
- 기원전 11세기~6세기 : 미송리형 토기문화 발전. 요북지역을 중심으로 번성(신성자문화). 사회발전 단계는 "계층사회-군장사회"로 진입했을 것으로 추정.
- 기원전 5세기 : 후조선(점토대토기문화)에 밀려 세력 소멸. 일부는 서북한으로 이동. 이를 계기로 대동강유역에 단군설화 등장.

2. 후조선
- 기원전 11세기~6세기 : 점토대토기문화 세력. 요서 대릉하유역을 중심으로 등장(십이대영자문화). 사회발전 단계는 "계층사회-군장사회"로 진입했을 것으로 추정.
- 5세기 : 중심지를 요북지역으로 이동하고 전조선 통합(정가와자유형). 요서-요동을 중심으로 번성. 한반도-일본열도까지 문화 전파. 일부 세력은 남한지역으로 직접 이주.
- 4~3세기 : 전국연 세력에게 요서 상실. 연과 교류하며 철기문화를 받아들여 초기 세죽리-연화보유형 형성.
- 2세기초 : 위만세력에게 피탈 후 일부 세력은 남한으로 이주

3. 위만조선
- 3세기말 : 요북-요중지역에서 다양한 주민구성을 바탕으로 세죽리-연화보유형 발전.
- 2세기초 : 후조선 흡수. 서북한-동북한-연해주 등을 세력권으로 둠. 고대국가(?) 형성.
- 2세기말 : 한나라에게 멸망. 이후 고구려가 주류 세력으로 등장.

이상입니다.

특기할 점은

1. 강역 관련해서 전조선-후조선-위만조선은 청천강 이남으로 넘어오지 못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서북한은 팽이형토기문화 세력이 기원전 12세기~2세기까지 존재 - 진국?)

2. 전조선과 후조선은 각각 요동과 요서에서 600여년간 병존합니다.

3. 기원전 천년기에는 전조선-후조선-위만조선 뿐 아니라, 부여, 진국(낙랑), 진번, 임둔, 옥저, 동예, 한-삼한, 고구려 등 다양한 세력이 한국고대문화권을 형성했다고 봅니다.

흥무대왕님의 댓글

본문 글에는 아래와 같이 의견 드립니다.

1.
a. "선진/한대 사료를 검토한 결과 기원전 20세기에 고조선이 국가단계로 접어들었다"는 주장은 이해할 수가 없네요. 중국에는 기원전 8세기 이전의 고조선 기록 자체가 없습니다. 유물과 유적 분석 결과를 봐도 기원전 20~15세기에는 "위계사회" 이상을 상정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b. 하가점하층문화의 상한은 기원전 21세기입니다. 이 문화는 삼족기가 주요 유물이므로, 한국고대문화권에 속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c. 누층적읍제봉건국가는 윤교수의 주장일 뿐,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고 봅니다.

2.
a. 저는 기자가 우리 역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b. 따라서 준왕이 "자준"일리도 없고, 위만이 "기자국"을 탈취한 사실도 없습니다.
c. 준왕조선을 후조선으로 상정한 것은 제 "상상"이 아니라, 물질문화에 근거하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문헌을 동원한 것입니다.

3.
a. 삼국유사/제왕운기를 진지하게 분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학계연구자나 재야연구자들은 차이점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b. 제 가설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입수 가능한 여러가지 고고학 성과를 바탕으로 고조선 시대를 설명하려고 노력 했고 그 결과물이 삼조선설입니다.

울티마툴레님도 시대별 고고 물질문화를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을 세우고 스스로 증명해 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흥무대왕님의 댓글

추가로 화하족(연나라가 화하족인지 좀 의문스럽지만...)이 난하유역에 도달한 건 기원전 4세기 무렵으로 보이고, 따라서 기원전 4세기 전에 화하족과 고대한민족이 투쟁하는 일은 없었다고 봅니다. 영역을 이웃한 일이 없으니까요.

오히려 산동반도-묘도열도-요동반도 경로를 통해 화하족-고대한민족간의 우호적인 교류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울티마툴레님 글을 보면 윤내현교수 글과 가설만 반복적으로 올리시는데, 다른 연구자들의 책과 논문도 폭넓게 읽고 비판적 시각을 키우시면 좋겠습니다. 특히 고고학계 저작들을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중국고대문헌과 사학계 통설을 극복하는데 고고학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 고대중국문헌은 모호한 내용이 많으니 너무 매몰되지 않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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