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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말갈의 정체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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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 이어서...)




아래는 1편의 가설을 바탕으로 도출한 내용입니다.


1. 말갈의 정체는 한반도 중북부지역에 존재하던 '예'족이며, 이 예족이 한사군 설치 영역의 기층 세력임

2. 기원전후에는 낙랑에 부용, 2세기 후반부터는 고구려에 부용

3. 3세기 초중반에 백제의 왕권을 장악에 성공. 중부지역 확보하며 마한과 고구려의 완충 역할 수행

4. 이후 해씨 왕통이 복귀하며 고구려와 대결 상태로 진입 (4세기 후반, 완충지대 소멸)


추가로 고구려와 백제,신라의 건국~4세기까지의 접촉 기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구려-신라 접촉

- 245년 신라의 북쪽 변경 공격 : 최초 접촉 기사.

- 248년 화친 : 246년 고위전쟁시 신라로 이탈한 고구려 군대 문제 해결, 이후 신라는 고구려에 조공했을 것으로 추정됨

- 392년 신라 볼모 확보 (이찬 아들 실성)


​고구려-백제 접촉

- 286년 대방 지원, 고구려가 원망 : 최초 접촉 기사

- 369년 백제 정벌(치양전투)에서 패함 : 갑작스런 전쟁. 사전에 뭔가 많은 사연이 있었을 듯.

- 371년 백제의 평양성 공격, 고국원왕 전사 : 한반도 지옥문 열림


말갈과 한성백제의 정체, 고구려의 백제,신라 관련 기사를 하나의 흐름으로 보면 아래 기사들이 이해가 됩니다.



- 삼국지 동이전 예조

單單大山領의 서쪽은 樂浪에 소속되었으며, 領의 동쪽 일곱 縣은 [東部]都尉가 통치하는데 그 백성은 모두 濊人이다. -> 단단대령의 서쪽,동쪽 모두 예인.


- 백제본기 책계왕 원년(286년)

마침내 군사를 내어 구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 고위전쟁때 고구려의 동맹이자, 고구려와 친연 관계인 우씨 왕통의 한성백제 시절임. 차마 공격은 못하고 원망만 함.


- 광개토왕비

백잔(百殘)과 신라는 옛부터 고구려 속민(屬民)으로 조공(朝貢)을 해왔다. -> 한성백제(우씨 왕통)는 고구려에 조공, 신라도 248년 이후 고구려에 조공했을 것으로 추정. 고구려는 3세기 중반에 이미 한반도 중부까지 안전선 확보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略取)해 온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 -> 한인은 마한인, 예인은 백제인


이상이 제가 가졌던 의문에 대한 스스로의 해답이지만, 아직 대답해야 할 의문들(ex. 삼국사기는 왜 예인을 '말갈'이라 표현했는가? 등)과 설명해야 할 기사들이 많은 어설픈 가설입니다. 그리고 어느 분 말씀처럼 고고학적 증거가 없다면 반쪽짜리 주장에 불과한데, 열심히 논문을 찾고 있지만 참고할 만한 논문이 얼마 없네요. 그래도 아래 2개의 논문은 제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박경신. "原三國時代 中島類型 聚落의 編年과 展開." 국내박사학위논문 숭실대학교, 2019. 서울

  -> 중도식토기 문화가 한성백제와 연결됨

박지희. "실직국의 역사고고학적 연구." 국내석사학위논문 가톨릭관동대학교, 2016. 강원도

  -> 강릉~울진을 아우르는 실직국의 문화양상은 '중도유형문화'로 인식되고 있는 동예의 문화양상과 거의 같음


- 출처: 박경신, 2019


1~3세기 평안도와 황해도 동부의 물질문화가 어떤것인지 궁금하네요.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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