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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조선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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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고대사에 관한 개인적인 탐구 글은 정리할까 합니다. 그동안 관심 갖고 봐주신 회원님들 모두께 감사 드립니다. ^^




지난 글의 마지막 그림인데, 연제조의 유민들이 요동으로 모여들어 세력을 형성하는 모습입니다. 여기에 위만이 망명하며 지도자가 되었고 후조선의 준왕으로 부터 서쪽 영역의 통치를 위임 받습니다.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눌 수 없다고 했던가요? 위만이 준왕을 공격하여 후조선을 장악하게 되고, 준왕은 바닷길을 통해 금강(?)유역으로 이동하여 한왕에 등극합니다.



문제는 위만의 중심지와 왕검성이 어디인가 하는 점인데, 아래 논문에서 흥미로운 가설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조법종. "낙랑군의 성격문제." 韓國古代史硏究 32.- (2003): 161-189. 낙랑군의 낙랑국 계승 문제를 중심으로.


논문에서 왕검성 부분을 간단히 요약하면,

사기 공신제후표를 분석해 보면 조선왕 우거 피살은 108년, 우거를 이어받은 대신 성기의 피살은 107년으로 왕검성의 함락은 107년이고, 따라서 108년에 설치한 낙랑,진번,임둔군에 왕검성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위만조선은 한나라의 외신이었고, 한나라와 주변 나라들의 사이에 위치하여 교역을 장악하고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위만 조선의 중심지는 평양보다는 요동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왕검성은 평시의 수도가 아니라, 전쟁이 시작되자 지도층이 이동한 일종의 군사요새로 보여집니다. 고구려의 평지성-산성 구조가 떠오르는데, 공교롭게도 왕검성 함락 후 설치된 현도군이 고구려의 저항으로 위치가 계속 변경된 사실도 오버랩 되네요. 아마도 위만조선의 붕괴에 따른 정치적 공백을 "고구려사회(건국 전의 고구려 세력)"가 차지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럼 평양은 무엇일까요? 평양은 후조선의 수도였고, 그래서 단군왕검의 설화가 남아있던 것으로 추측합니다.​ 고구려가 200여년에 걸쳐 평양에 공을 들이고 결국 천도까지 단행한 것은 (후)조선을 잇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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