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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운기 분석을 통한 고조선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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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은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입니다.


지난 글에서 <삼국유사> 분석을 통해 단군조선 중심지 이동과 고대 조선들의 연혁에 대한 가설을 세웠는데, 이번에는 <제왕운기> 분석을 통해 어떤 내용들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제왕운기의 내용은 아래 싸이트를 참고했습니다.

http://db.history.go.kr/KOREA/item/level.do?itemId=mujw&amp;bookId=&amp;types=r#book-show/mujw/mujw_002r



요동(遼東)에 따로 하나의 천하[乾坤]가 있었으니, 돌연히 중국[中朝]과 구분되어 나뉘었네.

...

요(堯)임금과 함께 무진년에 나라를 세워 순(舜) 임금 때를 지나 하(夏)나라 때까지 왕위에 계셨도다.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년에 아사달 산으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네. 나라를 다스린 지가 1,028년으로, 어찌 변화시켜 환인께 전할 것이 없었겠는가? 그 뒤 164년 만에 어진 사람이 다시 군신(君臣)관계를 다시 열었도다.


후조선(後朝鮮)의 시조는 기자(箕子)인데, 주(周) 무왕(武王) 원년인 기묘년 봄에, 이곳으로 도망하여 와 스스로 나라를 세웠으니, 주 무왕이 멀리 떨어진 봉토(封土)에 조서(詔書)를 내리셨네. 예로써 사례하지 않을 수 없어 찾아가 뵈니, 홍범구주(洪範九疇)로 인륜을 물으셨네. 41대손은 준(準)이라 부르는데, 다른 사람에게 침탈을 당하여 백성이 떠났도다. 928년을 다스렸으니 〈기자의〉 유풍(遺風)이 아름답고 도탑게 전하였다네. 준왕이 금마군(金馬郡)에 이주하여 도읍을 세우고 또 다시 능히 인군(人君)이 되었도다.


한(漢)의 장수 위만(衛滿)이 연(燕)에서 태어났으니, 한 고조(高祖) 12년(BC.195) 병오년이라네. 준왕(準王)을 공격하여 쫓아내고 나라를 빼앗으니, 손자 우거왕(右渠王) 때에 이르러서는 그의 허물이 가득차게 되었도다. 한 무제(武帝) 원봉(元封) 3년(BC.108) 계유년에 장차 군사들을 내어 토벌하게 하였네. 3대에 걸쳐 모두 88년이 되니, 한을 배반하고 준왕을 내쫓았으므로 재앙을 입어 마땅하도다.



요동에 중국과 다른 별개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고 표현하는데, 이 요동이 만주를 의미하는지는 추가로 확인이 필요합니다.


건국시기를 요임금과 같은 무진년로 보지만, 요임금의 실존여부나 간지의 불명확 때문에 이 연도는 무의미합니다. '어진 사람'을 '기자'로 해석 할 경우 B.C.2315년에 단군조선이, B.C.1123년에는 기자조선이 건국한 것이 됩니다. 1,028년(단군조선) +164년(혼란기) +928년(기자조선) +195년(위만조선 개국) = 2315년.


<삼국유사>와 비교해 보면 단군-기자(준왕)-위만조선으로 이어지는 흐름에서 동일하지만 단군조선의 존속기간이 다르고, B.C.13~12세기 사이에 164년간 혼란기가 있었다는 내용이 새롭게 나옵니다. B.C.13세기는 비파형 동검이 등장하는 시기이니 혼란기이자 전쟁의 시기로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시기의 차이는 있지만 단군이 아사달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는 표현은 <삼국유사>와 동일합니다.


<제왕운기>에서는 단군조선-기자조선의 계승이 순차적이며 평화적인 성격으로 보여지는데, 약간의 마찰이 있었다고 기록된 <삼국유사>와는 뉘앙스 차이가 있습니다.


기자조선은 후조선이라 부르며 정통성 있는 국가로 인정하고 있는데 반해, 위만조선은 경멸하는 투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기록을 보면 위만조선 초기에는 진번, 임둔 지역도 장악하지 못했는데, 다시 말해 거수국들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즉, B.C.195년에 고조선의 중심국 역할이 끝나고 위만조선을 포함한 열국시대로 접어 들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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