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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고찰한 바를 종합해 볼때 해방 이후에 출토된 부조예군, 부조장의 은인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지역에 있었다는 적극적인 증거가 될수 없고 해방전 일본인학자들에 의하여 조사 발굴된 고분.토성등 소위 평양의 낙랑유적은 그 조성연대가 한사군이 설치 되었던 서한시대가 아니라 그보다 늦은 동한시대 이후의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 하였다

그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 거운데는 서한시대나 그 이전의 것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것들은 늦은 시기에 제조된 유물과 함께 출토됨으로써 후대에 뭍혀진 것임을 알게하여 주었다 소위 낙랑유적의 성격을 밝힘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출토된 유물의 제조연대가 아니라 유적의 조성연대인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한가지 의문을 갖게된다. 그것은 한사군의 낙랑군은 서한 전기에 설치되었는데 지금의 평양지역이 한사군의 낙랑군 이었다면 어찌해서 그곳에서 서한의 유적은 보이지 않는가 하는점이다. 한사군은 서한시대에 설치되었지만 유적은 그보다 늦게 조성되었을 수도있다 그러나 그 많은 중국식 고분과 유적이 모두 동한시대 이후의 것이라면 그 성격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사군이 설치되어 있던 시기에 지금의 평양에는 어떠한 정치세력이 있었으며 평양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낙랑예군” “낙랑부귀”등의 문자가 새겨진 기와는 이 지역이 낙랑과 관계가있음을 알게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러한 의문은 다음의 기록이 해명하여 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5년(서기32)조를 보면

여름 4월에 왕자 호동이 옥저를 여행하였는데 낙랑왕 최리가 출행하였다가 그를 보고는 묻기를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같지 않은데 혹시 북쪽의 나라 신왕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드디어는 함께 돌아가 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위의 내용에서 神王은 고구려의 대무신왕을 뜻하는 것이니 崔理(최리)는 고구려를 북쪽의 나라라고 불렀음을 알게된다. 따라서 최리의 낙랑국은 고구려의 남쪽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이 기록은 서기 32년의 상황을 전하고 있는데 당시에 고구려 남쪽의 동부에는 濊(예) 또는 濊貊(예맥)이 있었고 최리의 낙랑국은 예의 서쪽에 있었으므로 최리의 낙랑국의 위치는 평양지역이 될 수밖에 없게된다. 종래에는 고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의 위치를 평양지역으로 보았기 때문에 최리의 낙랑국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최리의 낙랑국을 복원시켜 놓고 보면 문제점이 발견된다. 그것은 당시에 한사군이 이미 설치되어 있었는데 만약 한사군의 낙랑군이 평양지역에 있었다면 최리의 낙랑국과 한사군의 낙랑군, 즉 두 개의 낙랑이 같은 지역에 있었다는 모순을 나타내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존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필자는 서로 다른 지역에 있었던 두 개의 낙랑을 상정하게 된다. 하나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난하 하류 동부연안 즉 위만조선지역의 서부에 설치되어 있었던 한사군의 낙랑군이요 다른 하나는 지금의 평양지역에 있었던 최리의 낙랑국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낙랑에 관한 문헌의 기록은 두 종류로 구별해서 읽어야 한다.


지금의 평양지역에 있었던 최리의 낙랑국은 서기 37년에 멸망하게 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0년(서기37)조에는

“ 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그것을 멸망 시켰다” 라고 하였는데 이 기록만으로는 어느 낙랑을 멸망 시켰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同書(동서)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14년(서기37)조에는 “ 고구려의 왕 撫恤(무휼)(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그것을 멸망시켰다. 그나라(낙랑국)사람 5천명이 투항하여 오므로 여섯 부락으로 나누어 살게 하였다” 라고 하였으니 구구려 대무신왕이 멸망시킨 낙랑은 신라와 접한 지역에 있었으므로 최리의 낙랑국임을 알수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후의 기록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7년(서기44)조에는

“가을 9월에 동한의 光武帝(광무제)가 병사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취하여 郡縣(군현)을 만드니 薩水(살수)(지금의 청천강) 이남은 동한에 속하게 되었다”

는 기록이 보인다. 종래에는 이 기록을 한사군의 낙랑군과 연결시켜 인식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인식하기에는 논리적인 모순이 있다. 이 시기에는 한사군이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이미 자기들의 영토가 되어있는 한사군의 낙랑군에 군사를 파견하여 그 곳을 정벌하고 그 땅을 취하여 郡縣(군현)을 만들었다는 것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기록은 한사군의 낙랑군을 정벌한 것이 아니라 최리의 낙랑국이 있었던 지금의 평양지역을 쳤음을 말하고 있는 것임을 알수 있다. 바다를 건넜다는 내용은 그것을 한층 명확하게 하여 준다. 최리의 낙랑국은 이보다 7년전에 이미 고구려에 의하여 멸망되었지만 그 지역이 낙랑국이 있엇던 곳이기 때문에 낙랑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동한의 광무제가 낙랑국이 있던 평양지역을 친것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서 였다고 생각된다. 당시에 동한은 세력이 성장하고있던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그 배후를 공략하고 그곳에 군사식민지를 만들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한편 낙랑국이 고구려에 멸망된것은 오래지 않았었으므로 그 주민들은 아직 고구려에 동화되지 않았었을 것이고 또 저항감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낙랑국의 지배계층은 원래 한사군이 설치되기 이전에 낙랑군 지역으로부터 이주해온 사람이 대부분 이었을 것이므로 그러한 연고관계를 이용하여 동한의 세력을 빌어 낙랑국을 재건 하고자 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을 이용하여 동한의 광무제는 비교적 용이하게 평양을 칠수 있엇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후 이지역은 한반도에 있어서의 중국의 군사기지및 교역의 거점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앞에서 인용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7년조의 기록에 의하면 동한 광무제의 군사에 의하여 점령된 지역은 지금의 청천강 까지였는데 이것이 아마도 낙랑국의 북쪽 경계선 이었을 것이다.


동한 광무제에 의하여 점령된 평양지역은 그전의 명칭에 따라 낙랑이라 불리어졌고 행정적으로는 한사군의 낙랑군에 속하게 되었던 것같다. 평양지역이 낙랑이라고 불리어졌음은 토성지역에서 수집된 “낙랑예관” “낙랑귀부” 등이 새겨진 기와에 의하여 알수있는데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평양지역의 낙랑은 漢(한)시대의 낙랑군의 屬縣(속현) 땅이었을 것 이라고 하였고, 이익도 같은 견해를 피력한바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평양에서 발견된 중국식 유적인 소위 낙랑유적은 동한 광무제에 의하여 설치되었던 군사기지인 낙랑의 유적인 것이다. 


끝으로 한가지 부연해 둘 것은 지금의 평양지역에 연대가 빠른 중국식 유적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바르게 인식하는데는 매우 조심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잠간 언급하였듯이 평양지역에 있었던 낙랑국의 지배계층은 대부분 위만조선의 팽창과 서한 무제의 침략으로 인하여 낙랑군 지역으로부터 한사군이 설치되기 이전에 이주해온 사람들인데 낙랑군 지역은 고조선. 위만조선의 서쪽 변경에 위치하여 중국지역과 접경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중국의 문물에 매우 친숙해 있엇을 것이라는 점에 항상 유의해야 할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를 결론지으면 문헌과 고고학 자료를 분석.검토해 볼때 지금의 평양지역에 고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의 낙랑군이 위치했었다는 분명한 근거는 없다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종래의 선입관을 배제하고 충실하게 사료에 따라 고조선의 위치를 복원하는 작업에 임해야 할 것이다.



출처. 윤내현 한국고대사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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