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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이야기 - 두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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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통해 부여의 기원에 대해 확인 했는데, 추가로 기록을 다시 검토해 봤습니다.

일단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아래와 같이 주몽에 대한 기록이 또 있네요.


《삼국사기》

- 고구려 본기: 해부루 늙음 - 금와를 얻음 - 동부여로 이동/해모수 북부여 수립 - 금와 즉위/유하 만남 - 주몽 탈출

- 백제 본기: 주몽이 북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로 이동


《삼국유사》

- 해모수 북부여 수립(B.C.59년) - 부루 출생 - 부루 즉위 - 동부여로 이동 - 주몽이 북부여에서 졸본부여 수립(B.C.37) - 금와 즉위 - 대소 즉위 - 대소 사망(A.D. 22년)


즉, 《삼국사기》에 따르면 북부여는 졸본부여와 서로 다른 위치라는 것이죠.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총 22건의 부여 관련 기록이 있는데, 이중 A.D.22년까지의 14건은 동부여에 대한 기록이고, A.D.22년 이후의 8건은 북부여에 대한 기록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동부여와의 기록을 감안해 보면, 초기 고구려의 영역과 동부여의 영역이 가까운 곳에 위치했으리라 추정됩니다. 따라서 동부여의 위치는 두만강 하류가 아닌 두만강 상류(백두산 인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 경우 북부여, 동부여라는 이름은 부여간의 상대적인 위치가 아니라, 고구려를 기준으로 이름을 붙였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북부여는 북쪽, 동부여는 동북쪽).



- 부여 수립 (연대 불명, 제2송화강 유역) - 왕권 교체. 기존 왕통은 동쪽으로 이동하여 동부여 수립 (B.C.1세기경, 두만강 상류) - 이후 졸본부여/고구려 수립 (B.C.37년, 압록강 중류)



동부여의 위치가 고고학적으로 뒷받침이 되는지는 추가 검토가 필요합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기원전 1세기에 북부여의 왕권을 장악한 세력이 누구일까 하는 점입니다.

기원전 1세기에 요동에 한나라 세력이 침투하면서 어떤 세력은 남쪽으로 이동하여 신라를 이루고, 또 다른 세력은 북쪽으로 이동하여 북부여를 장악했습니다 (그 여파로 동부여와 고구려, 백제가 건국. 낙랑조선, 마한도 이 시기에 건국). 서로 다른 세력일까요, 아니면 한군현 설치의 여파로 진국이 붕괴되며 발생한 일일까요?


기원전 1세기는 정말 흥미로운 시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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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흥무대왕님의 댓글

찾아보니 가생이 동아게의 꼬마러브라는 분이 동부여의 위치를 저와 비슷하게 추정하셨네요. 그 분 주장이 여러가지로 합리적이던데, 어떤 분이신지 대화 해 보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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