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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년경 낙랑대방군 요동교치설 (feat. 진서지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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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낙랑군 변천사를 정리했는데, <진서지리지>에 나오는 낙랑,대방군 인구가 기존 대비 현저히 줄어든 것이 그 후로도 늘 의문이었습니다. 도대체 이렇게 줄어든 인구로 본토와 떨어져서 적지에서 독립적인 행정구역 유지가 가능할까?

그래서 <한서지리지>, <후한서군국지>, <진서지리지>를 다시 살펴보고 새로운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건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313년 이전에도 낙랑대방군의 교치가 있었을거라는 가설입니다. 가능성이 있는 가설인지 함께 살펴 보시죠. 먼저 3개 문헌에 나오는 요동 지역 한군현의 인원 변동을 보겠습니다.​​

파란색으로 표시된 <진서지리지>의 인구수는 추정치입니다. 군국지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호당 인구수를 4.2명으로 추정하여 계산한 것입니다. 각 인구에 따른 면적은 <삼국지>에 기반하여 km2 당 6명으로 계산했습니다.

데이터 중 <후한서군국지>의 요동군과 현도군의 인구수는 좀 이상합니다. 요동군은 호수 대비 인구수가 너무 작고 (호당 1.3명), 현도군은 호수 대비 인구수가 너무 많습니다(호당 27명). 데이터가 이상하다고 보지만, 일단 무시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중요한건 <진서지리지>인데, 여기에 계산된 면적을 바탕으로 낙랑과 대방군이 요동지역에 있다는 가정하에 지도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러한 그림은 그동안 제가 생각하고 있던 많은 의문점을 풀어줍니다. 각종 기록을 하나씩 보겠습니다.

  1. 246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20년 - 위군이.. 드디어 낙랑에서 퇴각했다.-> 3년간의 고-위 전쟁 끝에 한반도에서 위군 철수. 낙랑대방군은 이름만 남았을 가능성이 높음. 단, 247년 대방태수 왕기가 임명되는 걸로 봐서는 한동안 대방군이 유지되었을 수 있습니다.

  2. 247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21년 - 평양 천도 준비 -> 최소한 대동강유역은 고구려의 확실한 세력권에 들어옴

  3. 258년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 25년 - 봄에 말갈 추장 나갈(羅渴)이 좋은 말 10필을 바쳤다.-> 봄에 좋은말 10필은 국혼(國婚)을 상징. 즉, 고이왕의 아들 책계와 대방국왕 나갈의 딸 보과의 결혼이 거행. 양국 동맹관계 수립. 이로 미루어 짐작컨데, 250년경 대방지역은 독자세력 대방국이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있음. 진 낙랑,대방군의 요동 교치는 이때쯤일 것으로 추정함.

  4. 280년 <진서지리지>

  5. 286년 <삼국사기> 백제본기 책계왕 원년 -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치자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대방왕의 딸 보과(寶菓)에게 장가들어…-> 258년의 국혼을 의미함. 이때의 고구려 국왕은 서천왕으로 할아버지 동천왕 때 있었던 백제의 도움을 기억하여 고구려군이 '원망'만 하고 돌아감. 하지만, 이 일로 기존 빚은 청산됨

  6. 298년 <삼국사기> 백제본기 책계왕 13년 - 가을 9월에 한(漢)나라가 맥(貊) 사람들과 함께 쳐들어왔다. 왕이 나가서 막다가 적의 군사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기존 낙랑지역 세력을 한나라로, 고구려인을 맥인으로 표현한 것으로 추정 (고구려 국왕은 봉상왕). 이때 대방국이 고구려에 점령 당했을 가능성이 높음

  7. 300년 <삼국사기> 신라본기 기림이사금 3년 - 樂浪·帶方两國歸服 (낙랑과 대방 양국이 항복하여 복속해 왔다)-> 이제야 왜 이 기사에서 낙랑과 대방을 국(國)으로 표현했는지 이해가 되네요. 298년 대방국 함락 후 낙랑대방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직접 통치가 시작되고, 낙랑,대방국의 기득권층이 신라로 귀복한 것으로 보입니다.

  8. 302년 9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 3년 - 왕이 병력 30,000명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략하여 8,000명을 포로로 잡아 이들을 평양으로 옮겼다.-> 요동 현도군에서 잡은 포로를 평양으로 이송. 당연한 일이고...

  9. 304년 2월 <삼국사기> 백제본기 분서왕 7년 - 봄 2월에 몰래 군사를 보내 낙랑(樂浪)의 서쪽 현(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백제의 고구려 공격 시작

  10. 304년 10월 <삼국사기> 백제본기 분서왕 7년 - 겨울 10월에 왕이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고구려가 임명한 황해도 낙랑태수의 대백제 복수전

  11. 311년 8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 12년 - 서안평(西安平) 점령-> 드디어 서안평을 점령했네요.

  12. 313년 4월 <자치통감> 효민황제 건흥 원년 - 요동의 장통이 낙랑과 대방 2군을 점거하여 고구려왕 을불리와 더불어 서로 공격한 것이...-> 요동의 장통이 어떻게 그동안 낙랑과 대방을 점거했는지 이해할 수 있음. 낙랑과 대방이 요동에 있었기 때문임. 그리고 이때 낙랑군의 요서 교치가 일어남

  13. 313년 10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 14년 - 겨울 10월에 낙랑군(樂浪郡)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낙랑군은 4월에 이미 요서로 교치되었으나, 여기서 낙랑군으로 표기한 지역은 교치 전에 낙랑군이 있던 요동지역으로 추정됨

  14. 314년 9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 15년 -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략했다.-> 남쪽으로 표현한것이 의문스럽지만, 대방군이 환도성보다 상대적으로 남쪽에 있을 가능성이 있겠네요.

  15. 315년 2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 16년 - 현도성(玄菟城)을 공격하여 깨뜨렸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낙랑,대방,현도 등 요중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파상공세.

  16. 319년 12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 20년 - 진 평주자사 최비 귀순-> 요중지역 전체 사령관의 귀순이라... 이때부터 요중지역을 두고 모용선비와 고구려의 쟁투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17. 405년 1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14년 - 봄 정월에 〔후〕연[燕]의 왕 〔모용〕희(慕容熙)가 요동성(遼東城)을 공격해왔다.-> 한 요동군의 치소인 양평에 이미 고구려의 요동성을 쌓았네요. 언제 획득한 걸까요? <양서>와 <북사>에 따르면 광개토왕 6년(397년)경인듯 합니다.

위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246년 고-위 전쟁의 결과로 위나라 세력은 한반도에서 일소되었고, 그 후 몇년안에 황해도 지역의 낙랑과 대방은 독립하고 기존 낙랑군과 대방군은 요동지역으로 교치되었다. 이후 298년경 독립적인 낙랑국과 대방국은 고구려에 병합당하고, 잔여세력은 신라로 귀부. 한편 250년경 요동지역으로 교치된 진나라의 낙랑,대방군은 313년에 다시 요서지역으로 교치되며 한국사와 멀어진다.

이상이 한군현 인구변화와 관련 기록들을 검토하여 얻은 결론입니다. 물론 이 가설은 가설에 반하는 문헌이나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된다면 당연히 수정해야 합니다.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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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8

흥무대왕님의 댓글

그러고 보니 기원전 280년경 연나라가 설치한 요동군 지역이 680년만에 고구려에게 귀속됐네요.
하지만, 고구려-발해를 거쳐 420여년 후 다시 요나라에 귀속된 건 함정. ㅋ

흥무대왕님의 댓글의 댓글

저는 그 후 방의 뜻을 알게되서 이해하고 있는데, 님은 언제까지 과거에 매달려 있을건가요?

흥무대왕님의 댓글의 댓글

저와 아직 할 얘기가 남으신 듯 하니, 여기서 하시죠.
이슈는 2가지 인 듯 하네요.
1. 제가 감방친구님 연구결과를 흠쳤다는 주장
2. 위구르님을 무시한 행위

두 개를 함께 얘기하면 혼란스러우니 먼저 1번에 대해서 의견 나누죠.

링크 주신 글을 보니 한서지리지, 후한서군국지, 진서지리지에 나오는 한군현 인구변화에 대한 글이던데, 제가 그 글을 훔쳤다는 건가요?

로또님의 댓글

저는 낙랑군은 두개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오리지날 낙랑군으로써 <요동지역>에 설치.부여가 동한시기에 낙랑군을 때리기도 합니다.
둘째로 한반도 낙랑군으로써 <평양지역>으로 의심되며 낙랑국의 옛 땅이죠.삼국사기에 동한이 광무제때에 낙랑국 지역에 군현을 설치했다고 기록.
현재 낙랑군 위치문제로 논란이 많은 이유는,낙랑군이 하나밖에 없었다고 믿기때문이죠.
그러니깐 재요동으로 보이는 기록을 제시하면서 낙랑군재평양설을 욕하고,또 평양에 있는듯 의심되는 기록을 제시하면서 낙랑군은 평양이라고 맞받아 싸우고...
심지어 나중엔 교치설까지 등장하는 상황입니다.

한서지리지/후한서/삼국지는 두번째 낙랑군을 중심으로 기록하다 보니...패수의 흐름이 방향이 180도 바뀌고, 부여가 난데없이 낙랑군을 때리고...

- 이상 아직은 정리중에 있는 저의 가설입니다.(언제든지 변할수 있습니다)

흥무대왕님의 댓글의 댓글

저도 이 모든 혼란의 시작은 낙랑군이 여러 곳에 등장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제 가설을 봐도 대동강유역 -> 황해도 -> 요동 -> 요서... 아무튼 열심히 연구하다 보면 정답에 근접할 수 있겠죠.

로또님도 화이팅입니다.

위구르님의 댓글의 댓글

'둘째로 한반도 낙랑군으로써 <평양지역>으로 의심되며 낙랑국의 옛 땅이죠.삼국사기에 동한이 광무제때에 낙랑국 지역에 군현을 설치했다고 기록'

만에 하나 그 소설이 사실이라 치더라도... 불과 17년이 지난 서기 49년에 모본태왕이 북평과 어양, 상곡에 이어 태원까지 다다르는 장거리 침공을 감행한 점을 보아 현 평양 지역은 서기 32년 당시에는 그야말로 일시적으로 한나라의 영향권에 있었거나 아예 그 밖에 있었을 것임. 왜냐하면 모본태왕 대에 고구려가 그런 막강한 힘이 있으면 마땅히 적이 도사리며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후방을 정돈하는 편이 우선이기 때문. 그런데 삼국사기와 한서 어디에도 모본태왕이 낙랑군을 먼저 쳤다는 말은 없음

로또님의 댓글의 댓글

고구려 초기 지역을 어디에 설정하냐에 따라, 모본태왕의 침공 기록이 소설이 될수도 있겠지요.
김부식 어르신의 말씀대로 고구려 초기 지역이 요나라 동경의 서쪽이였다면 가능하겠지만 ~

위구르님의 댓글의 댓글

사서에 명백히 기록되어서 소설이지는 않습니다. 또 고구려가 처음 어디에 세워졌는지가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얼마든지 서쪽으로 확장했을 수 있으니까요

위구르님의 댓글의 댓글

'심지어 나중엔 교치설까지 등장하는 상황입니다'

https://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73011&sca=&sfl=wr_subject||wr_content&stx

낙랑군은 나중에 가면 지금의 보정시에 위치한 점이 포착되는데 그런 면에서 교치설은 충분히 타당함

흥무대왕님의 댓글

본문의 가설에 대해서 몇가지 반론이 제기되었습니다.

​1. 기원후 1세기경 한대 전체인구 5,000만명 vs. 기원후 3세기경 위촉오 전체 인구 757만명
  -> 중국 전체 인구가 대폭 감소했는데, 이를 단순 적용한다면 한군현 인구수 감소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다만 이 당시 동북아 전체 인구가 감소한 건지, 중국만 혼란통에 감소한 건지 확인이 필요해 보입니다.

2. 246년 이후에도 낙랑.대방군이 운영되었다는 기록 : 해동역사 권5 사군사실 a. 가평 원년(249)에 하후패가 촉으로 도주하자 그 일족을 낙랑군으로 사민, b. 가평 6년 (254) 이풍의 난이 발각되자 그 원친들을 낙랑군으로 사민, c. 함녕 2년(276) 창려,요동,현도,대방,낙랑을 평주로 분리, d. 영평 원년(291) 동안왕 사마요를 폐왕하고 대방군에 안치, e. 유요가 약관 시절 조선으로 달아나 조선현령 최악의 측근이 됨
  -> 이상의 기록들은 마치 낙랑대방군의 교치는 없이 별탈없이 운영되고 있었다는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달리 볼 수도 있는데, 246~249년 사이에 다른 기록은 없는지 확인이 필요하네요.

3. 평안도,황해도 지역에서 4세기에도 중국의 연호를 사용한 전(塼)이 다수 발견됨. '대방태수장무이'명 전의 존재, 후대 '낙랑인'을 자칭하는 사람들의 묘지명 등 고고학 증거
  -> 각각은 모두 재반론이 가능하지만, 일단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는데 조각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겠네요.


이상의 반론을 검토하고 보완해야 하는데, 시간은 꽤 걸릴 듯 합니다. 그럴 시간이 있으려나...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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