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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무대왕님이 제가 종교적으로 나아간다고 우려하셔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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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출현은 인류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수렵 채집시대에서 농경으로 넘어가던 시기에 출현한 것으로 여겨지는 종교는 개인을 집단으로 묶는 강력한 도구였습니다.

예를들어 수렵채집을 기반으로 농경으로 나아가던 괴베클리테페인들의 유적을 보면 종교적상징이 가득합니다. 그렇기에 그 오래된 시절에 그런 유적건설이 가능했던것이죠.

종교의 역할은 어디서든지 비슷합니다. 노동력결집을 위한 수단이자 분배불만을 해소하는 강력한 신념체계였죠. 심지어 상나라나 아즈텍에선 목숨까지도 바치는 극단주의로 까지 발전할 정도였습니다.


각설하고 종교의 영향은 고대한민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먼저 1만5천년전 간빙기에 동남아에서 지나동해안을 따라 한반도와 만주로 이주한 인류는 급격히 닥쳐온 빙하기로 인해 대다수가 굶어죽거나 얼어죽었다고 봅니다. 극소수가 동굴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다 급격히 다가온 간빙기로 인해 현세시대가 개시되면서 서서히 인류는 다시 북상했습니다. 루트는 동일했습니다.


그런데 약 7천년전부터 계속해서 알타이서쪽에서 다른 인류가 고대초원길을 따라 동진해왔습니다. 그과정에서 그들은 말馬을 가지고 왔고 북상을 완료한 인류와 섞이면서 동아시아의 국가역사가 개시되었다고 봅니다. 이들의 혼합이 고대한민족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들은 말馬과 종교를 가지고 온 지배집단과 피지배집단으로 나뉘어 졌습니다. 


알타이서쪽에서 이주한 "단군족"은 홍익인간재세이화로 대표되는 태양숭배신앙을 바탕으로 말을 이용해 홍산문명과 뒤이어 하가점하층 중층문화까지 이루었습니다. 


결론적으로 고대한민족의 활동을 시대적으로 구분하자면


1. 추방사회단계였던 홍산문화와 남방에서 올라와 정착한 사람들과의 혼합이 이루어진 하가점하층문화 단계에서 국가단계로 진입했습니다. 이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4500년전으로 추정됩니다. 이시기를 저는 "단군조선시대"로 명명합니다. 이시기 단군조선은 요하 바로 서쪽ㅡ발해북안에서 일어났으며 팽창방향을 서쪽으로 잡았습니다. 이유는 교역의 편리성때문입니다. "요택"의 존재로 인해 요하는 건너기쉽지않은 강이었습니다. 따라서 단군조선은 동이족이 살아가던 지나동해안일대와의 교역이 주를 이룬 것입니다. 


2. 살벌하게 전개되던 중동과 달리 동아시아는 상나라가 성립되던 3천년전까진 상호간 무력충돌이 드물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중동과 달리 동아시아와 유럽은 밀림지대였습니다. 당시 동아시아와 유럽에 살던 인류의 농기구로는 벌채와 개간이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단군조선은 청동기와 말과 태양숭배신앙을 가지고 주위 큰 부족들과 혼인동맹을 강제하거나 이루어 세력을 넓혀갔습니다. 


3. 그러다 본격적으로 철기가 무기와 농기구로 사용되자 밀림의 벌채와 개간이 가능해졌고 약 2500년경에는 지금의 북경남쪽 즉 하북성 남쪽까지 고대지나족이 팽창했으며 단군조선은 이들과 경계를 맞닿게되자 그간 소홀이해온 요동으로 중심지를 옮겨갑니다. 그러자 요서지방에 있던 대읍(낙랑 진번 임둔 등)들은 그야말로 혼란기로 접어듭니다.  춘추시대를 거쳐 전국시대로 옮겨간 고대지나족들과의 교류와 전쟁이 벌어진것이죠. 그야말로 고대봉건제였던 단군조선은 사회정치적으로 대혼란에 빠졌습니다. 


4. 약 2500년~2000년 이시기는 단군조선이 해체되는 과정입니다. 마치 주나라가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며 유명무실화된 것처럼 단군조선도 유명무실해졌습니다. 먼저 단군조선은 약 2400년경 요동으로 중심지를 옮기며 "진국"으로 새출발했습니다만 요서와 요하북서쪽 요하북동쪽 등에 있던 대읍들이 독립하며 각종 부여라는 나라들로 바뀌었습니다.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에 버금가는 게다가 발전을 거듭한 고대지나족의 개입까지 있는 대혼란시대가 개시된 것입니다. 


5. 이에 진국은 위만정권붕괴후 약2100~2000년전 사이에 요동까지 위협하는 한나라를 피해 한반도 남부로 이동했습니다. 그자리엔 고구려 부여 숙신  말갈등 각종세력이 자리잡았습니다. 




이상이 최후간빙기이후 2000년전까지 한반도와 만주와 지나동해안일대에 살던 인류가 고대한민족으로 분화해나가는 과정에 대한 저의 생각입니다. 


앞으로 시간이 나는대로 구체적인 내용으로 설명할 계획입니다. 전 유물은 믿지 않습니다. 유적이 중요합니다.  유적유물을 동시에 고려해서 고고학적 근거를 덧붙일 생각입니다. 

동시에 인류학과 유전학의 연구결과도 소개할 예정입니다.  제가 오랫동안 살펴본 결과 이미 학계의 연구들은 제가 생각하는 방향과 비슷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를 종합한 결과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참고로 환단고기에 대한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환단고기의 황당함은 환국에서 잘나타납니다. 

인류의 발전속도는 교통수단의 속도와 일치합니다.  말이 가축화되어 교통수단이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5~6천년전입니다. 따라서 그이전엔 제국이란것이 불가능합니다. 중동과 이집트엔 낙타가 있었지만 동아시아엔 없었습니다. 따라서 지금으로부터 5천년이후에나 동아시아나 유럽에서의 제국이란게 출현가능해집니다. 이를 고려하지않은 주장은 다 헛소리지요. 동시에 동아시아나 유럽은 강이 많습니다. 즉 배가 꼭 필요하지요. 배의 발전도 말과 비슷한 시기입니다. 


하지만 환단고기의 가치는 단군조선이후에는 있다고 봅니다. 이유립의 공상이라고 치부하지만 북애노인의 저서는 이미 조선시대에도 있었고 서울대규장각에 영인본이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건 어느계열에서 내려온진 모르지만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기록을 저서든 구술이던 이어왔고 그게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과거 사람들의 역사적 상상을 접하게 된단것이죠. 환단고기는 실증주의적 역사관에 없는 역사적상상력을 주는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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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0

흥무대왕님의 댓글

잘 봤습니다. 2가지 점을 지적하고 싶네요.

1. 제가 앞서 댓글에서 "역사를 학문이 아닌 종교의 수준으로 끌어올리시는 듯 하여 심히 우려됩니다." 이렇게 쓴 이유는 역사에 종교를 끌어들이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울티마툴레님이 가설-검증-재가설의 과학적 방법론이 아닌, 특정한 주장을 "광신도적인 믿음"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듯 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오해가 있으신 듯 하고, 만일 광신도적인 믿음이 아니라면 다행입니다. 님이 기존에 올린 글에 별도로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2. 제목에 특정인을 언급하여 "저격"하는 형태의 글은 쓰지 않았으면 합니다. 제게 얘기하고 싶다면 댓글이나 쪽지로 얼마든지 말씀하시면 됩니다. 예전 가생이에서 그리고 최근 수다방에서도 특정인을 찍어서 쓰는 글이 보이던데, 그건 올바른 게시판 문화는 아니라고 봅니다. 최소한 여기 역사게에서는 그러지 말자고 부탁 드립니다.

이 글 자체에 대한 질문은 다른 댓글로 드리겠습니다. 먼저 님이 5월에 올린 글들부터 읽고 거기서 시작하겠습니다.

울티마툴레님의 댓글의 댓글

제 주장은 환단고기를 보면 단군조선의 혼란기가 잘나와있는데 대략 bc500년경부터입니다. 그뒤 여러 국가명이 나오는데 유추해보자면 아마도 그런 혼란기가 분명히 있었을것입니다
그런데 고대중국기록을 보면 진개침략후 경계를 만번하로 했다고 나옵니다. 만번하는 지금 난하의 지류로서 진개전쟁이후 국경선의 큰변화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단군조선내부는 아마도 새로운 변화의 시대로 접어들었을 것입니다.
이에대한 상상의 근거를 환단고기로부터도 알 수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부흥카페식의 매도는 맘에 안드네요

흥무대왕님의 댓글의 댓글

"광신도적인 믿음"이라는 용어는 제가 지나쳤습니다.
사과 드립니다.
마음 푸시기 바랍니다.

흥무대왕님의 댓글

그동안 청동기시대만 보느라, 울티마툴레님 글을 상세히 보지 못했습니다. 삼조선에 대한 검토는 끝났으니 저도 이제 앞 시대로 넘어가서 공부해 보겠습니다.
일단 5월에 님이 올리신 글에 몇 가지 질문을 달았으니 답변 부탁 드립니다. 3주전에 올린 질문에도 답변을 안주셨더군요. 모르면 "모른다", "증거는 없고 추정에 불과하다"고 답을 주셔도 무방합니다. 정답을 기대하지는 않으니까요. 하지만 의견은 꼭 남겨주세요.

울티마툴레님의 댓글의 댓글

아직은 먹고사는일에 바쁘다보니 미쳐 답을 못달았네요. 고백하자면 아직 제생각은 윤내현교수의 상주사와 한국고대사신론을 벗어나지 못했네요.  그간 흥무대왕님같은 분들도 못만났었고 경제적 사정도 여의치않아서요
시간은 많으니 앞으로 차근차근 대화해보겠습니다

흥무대왕님의 댓글의 댓글

윤내현 교수님 책은 저도 작년에 많이 읽었는데, 고고학 성과와 매칭이 안되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결론은... 진실을 찾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의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데 생각이 미쳤구요.
신채호, 리지린, 윤내현, 김상, 조승완.... 또한 어제의 저.
모두 의심의 대상이고, 물질적 증거가 없이는 일단 가능성의 영역으로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말씀 하신 대로 아직 시간이 많으니 천천히 논의 해 보시죠.

흥무대왕님의 댓글의 댓글

참고로... 저도 작년에 처음 고대사를 접했을 때는 문헌 분석만으로도 진실을 찾을 수 있을거라 기대했습니다. 강단사학이 문헌을 왜곡된 시각으로 해석한다는 생각이 강했구요.

하지만 한동안 여러가지 책과 자료를 읽은 후 느낀 점은, 문헌사학으로 접근하는 방법의 문제점은...
일단 우리 자체의 기록이 너무 적다는 점이었고, 중국의 문헌들은 춘추사관에 의한 정치적 왜곡, 지리적 거리에 따른 한반도에 대한 정보의 부족, 정보 전달의 오류 등으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전 "환단고기"는 참고문헌에서 제외합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구요...)

그래서 고고학으로 눈을 돌린게 올해 초였는데, 고고학도 한계는 있더군요.
북한,중국,일본 학자들의 쇼비니즘에 따른 정보 공유 미흡 & 유물의 왜곡된 해석, 요동/북한 지역 발굴의 미비, 유물/유적 수의 절대적 부족 등등...
1990년대에 비하면 2020년대의 고고학 성과의 누적은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갈 길이 먼 듯 합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분자인류학과 기후학에 관심을 가지고 보고 있는데, 이건 또 너무 거시적인 관점이라 "한민족의 역사"에 대해서 말해 줄 수 있는 건 많지 않겠더군요.  게다가 유전자와 문화와 언어와 정치세력은 서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는다는 점이 해석의 어려움을 낳습니다.

아무튼 다양한 방법론을 교차 적용해 가면서 검증하다 보면 우리가 찾는 일말의 진실에 도달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진실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도 즐기면서 하면 좋겠구요.

참고하세요.

울티마툴레님의 댓글의 댓글

그간 한국역사학계의 게으름과 무능이 중국 러시아 북한의 고고학적 발굴성과를 국내에 소개하는데 저해요인이었죠

예를들어 70년대말 중국이 아직 유물사관에 천착할때 나온 "갈석고"란 고고학적 역사학적 논문을 보면 갈석산이 지금의 진황도시에 있는 산이란걸 확고히 알 수 있죠. 그러나 윤내현을 제외한 당시 어느누구도 그 논문을 몰랐습니다

흥무대왕님의 댓글의 댓글

그렇군요. 윤내현 교수가 폭넓게 보셨네요 그런데 진황도시 인근에 우리 민족과 관련된 물질문화가 없다는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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