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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위 전쟁의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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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아래와 같이 7개의 꼭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평양성의 위치를 추적하는 이유

2) 문헌을 이해하는 방법

3) 평양성과 관련된 기록

4) 낙랑군 인구변화 추정법, 영역, 의문점

5) 고구려-위 전쟁의 재구성 (흥무대왕)

6) 고구려-위 전쟁의 재구성 (이승호)

7) 결론


1,2번 꼭지는 개인적인 얘기이니 넘어가셔도 됩니다.



1) 평양성의 위치를 추적하는 이유


제가 고대사 공부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일년전 우연히 갖게 된 하나의 의문 때문이었습니다. 그 의문은 <삼국지> 한전에 나오는 위만조선의 역계경이 망명한 동쪽의 진국(辰國), 그 나라의 정체는 무엇일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어려운 문제는 아닐거라 생각하고 이런저런 자료를 보기 시작했는데, 대부분의 자료는 진국을 삼한의 전신으로 생각하고 남쪽 방향에 있다고 보더군요. 재미있는 점은 <삼국지>에 나온 "동"쪽이 문헌의 오기일 것이다라고 명확히 지적한 자료는 없었습니다. 다들 침묵하는 느낌이랄까.


그때부터 제 공부가 시작됐습니다. 진국과 관련된 책과 자료를 보기 시작했고 (카페에 가입한 것도 그때쯤이네요), 만일 아무도 진국을 정확히 모른다면 우리나라 과거의 시공간을 모두 확인 해보면 빈 곳이 나오겠지 싶어서 시간적으로는 구석기시대에서 5세기까지, 공간적으로는 중국의 난하에서 일본의 기내 지역까지 훑어 봤습니다. 사관으로는 대동강고조선설, 이동설, 요동고조선설, 대륙고조선설, 요동공동체설도 살펴보고, 학제적으로는 문헌사학, 고고학, 기후학, 인류분자학 등도 떠들어보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아직은 진국을 못 찾았습니다. 중요한 건 "진국"이라는 주제가 제게는 이솝이야기의 "포도밭에 숨겨진 보물"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형제들이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보물을 찾기 위해 포도밭을 파헤친 덕분에 풍성한 포도를 수확했듯이, "진국"을 찾기 위한 저의 여정이 무수히 많은 (개인적인) 성과로 연결되었습니다. 제가 기존에 올렸던 글들이 그러하고, 평양성의 위치도 그 중 하나입니다.


또다른 중요한 성과는, 역사공부를 통해서 알게된 수많은 학자, 연구자들과 동호인들. 그들 모두에게 존경과 애정을 갖게 되었다는 겁니다. 남들은 부동산이다 주식이다 돈만 벌기 위해 눈이 벌건데, 오로지 진실을 찾기 위해서 그 많은 시간과 노력을 문헌과 유물과 함께 보내는 분들을 보면, 그 주장이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동질감과 존경심과 애정을 느낄 수 밖에 없더군요.



2) 문헌을 이해하는 방법


지난 일년간 공부를 하며 나름 문헌을 이해하는 시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먼저 중국문헌의 경우 "춘추사관"을 감안하여 아래와 같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1. 중국에 유리한 사실은 부풀려서, 2. 중국에 불리한 사실은 빼거나 축소해서, 3. 중국과 관련 없는 사실은 객관적으로 적혀있음. 사례는 무수히 많으니 생략합니다.


한국문헌, 콕 찝어서 삼국사기는 "모화사상"을 감안해야 합니다. 대표적으로 다음 기사를 보시면, "처음에 신하 득래(得來)는 왕이 중국을 침략하고 배반하는 것을 보고 여러 차례 간언하였으나 왕이 따르지 않았다. 득래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 땅에 장차 쑥이 나는 것을 보리라.”라고 하고 마침내 음식을 먹지 않고 죽었다. 관구검이 모든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그의 무덤을 허물지 말고, 〔무덤 주변의〕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으며, 그의 처와 자식을 포로로 잡았으나 모두 놓아서 보내주었다." 이게 어느 나라 역사가가 쓴 글일까요? 위나라? 당나라? 애석하게도 고구려본기의 기사입니다. 이 글은 아마도 김부식의 글이 아니라 고구려본기를 편찬한 통일신라시대 사가(史家)의 시각이겠지만, &lt;삼국사기&gt; 전체에 이런 시각이 넘쳐나니 감안해야 합니다. 따라서 삼국사기를 읽을때는 중국문헌의 1,2,3항을 동일하게 감안해야 하고, 추가로 한가지 더 감안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4. 신라,고구려,백제의 정통성에 의문이 제기될 만한 내용은 삭제/축소/변경 되었다. 이건 기회가 되면 말씀 드리죠.


따라서 저는 문헌을 볼 때 사가의 감정적 표현은 모두 배제하고, 팩트만 봅니다. 예를 들어 전쟁의 경우, 전쟁 전의 상황과 그 후의 상황 변화 등을 판단하여 승패를 분석합니다. 몇명이 죽었네, 누가 치욕을 당했네 등등의 표현은 모두 잡음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고구려-위 전쟁(이하 고위전쟁)의 승자는 누구일까요? 5번 꼭지에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3) 평양성과 관련된 기록


동천왕 21년(247) : 築平壤城

고국원왕 4년(334) : 増築平壤城

장수왕 15년(427) : 移都平壤


제게는 이 기록이 너무나 간결하고 명확해서 시적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247년에 처음 성을 쌓고, 334년에 증축하고, 427년에 천도했다. 이 이상 평양성(대성산성)의 역사를 잘 설명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동천왕의 평양성을 압록강변에서 찾는 건 장수왕의 평양성을 요동에서 찾는 것과 비슷해 보입니다. 고백하자면 저도 한동안 장수왕의 평양성을 요동에서 찾아 헤맸습니다. 그러나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해 보니 가설이 삐걱거리는 걸 느꼈고 어느 순간, 문헌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국과 중국의 문헌에 등장하는 모든 평양 중에서 동천왕의 평양성만 유일하게 다른 곳일 가능성이 얼마나 있을까요? 게다가 247년의 평양성이 제가 아는 한에서는 모든 문헌에 나타나는 평양 중 최초인데, 그 최초의 평양성만 다른 곳에 있었을 가능성은 얼마일까요? 그 가능성이 무척 낮을거라고 생각합니다.



4) 낙랑군 인구변화 추정법, 영역, 의문점


제가 지난글에서 140년 대비 280년의 낙랑군의 인구는 93%가 줄었다고 표현했는데, 어떻게 이런 숫자가 나온 건지 설명 드리겠습니다.



위 자료를 보시면 현별 숫자가 정확히 나온 건 기원전 45년 기록인 초원4년호구부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나머지 숫자들은 추정을 해야 하는데요, A와 B를 낙랑, C는 대방, D를 영동7현으로 놓고, 초원4년호구부와 서기2년 한서지리지의 전체 호수를 감안하여 군별 호를 계산해보면 서기 2년의 낙랑은 42,709호, 대방은 10,589호, 영동7현은 9,514호로 추정됩니다. 이 호수를 다시 서기 140년의 후한서군국지의 전체 호수에 비례 적용하여 계산해 보면, 낙랑은 49,275호, 대방은 12,216호로 추정됩니다(영동7현은 제외). 140년의 낙랑 호수 49,275호와 진서지리지의 3,700호를 비교해 보면 92.5%의 호가 사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방은 약 60%의 호가 사라졌습니다.


현수(縣數)는 11개에서 6개로 줄었고, 인구는 7.5% 밖에 남지 않았다? 제게는 이것이 평안도와 황해도 거의 전체를 점유하던 낙랑군이 황해도의 작은 지역으로 축소, 교치된 결과로 보입니다.


낙랑군의 영역 변천은 아래와 같이 추정합니다.




가장 인구가 많았던 서기 2년은 약 41만명, 이를 6명/km2 (3세기초반 부여와 한의 인구밀도) 로 환산하여 면적을 계산하면 약 6만8천km2 입니다. 이 면적은 서북한이라 부르는 지역 전체에 맞먹는 넓이입니다 (A영역).


그림에서 B 영역은 140년의 인구수로 추정한 그림인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4년(서기 57년)에 "영토를 넓혀 동쪽으로 창해(滄海)에 이르고 남쪽으로 살수(薩水)에 이르렀다." 라는 기사가 나타나는 걸 보면 낙랑군이 B영역으로 줄어든 건 서기 57년의 일로 보입니다.


가장 인구가 적었던 서기 280년은 약 3만6천명(대방군 포함)인데, 이를 동일한 논리로 면적으로 환산하면 약 6천km2 입니다. 이 면적은 현재 북한의 황해남도 보다도 작은 면적입니다. 이 때 낙랑군 치소의 이동과 교치가 발생했다고 봅니다.


한반도 내부에서 교치된 기록이 왜 없을까요? 이 글의 2번 꼭지를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다만, 어느 시기에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은 남아 있습니다.



<삼국지> 한전

[後漢의] 桓帝·靈帝 末期에는 韓과 濊가 강성하여 [漢의] 郡·縣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니, [郡縣의] 많은 백성들이 韓國으로 유입되었다.

建安 연간(A.D.196~220; 百濟 肖古王 31~仇首王 7)에 公孫康이 屯有縣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帶方郡으로 만들고, 公孫模·張敞 등을 파견하여 漢의 遺民을 모아 군대를 일으켜서 韓과 濊를 정벌하자, [韓·濊에 있던]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고, 이 뒤에 倭와 韓은 드디어 帶方에 복속되었다.



후한 환제,영제 시대면 2세기 후반대입니다. 한예의 강성은 아마 146년 태조대왕의 서안평현 공격이 그 신호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낙랑군은 그 후 몇십년에 걸쳐 대부분의 영역과 인구를 상실하고, 황해도 지역으로 군현의 내부 교치를 진행했다고 봅니다. 그 후 204년 낙랑군의 일부 현을 묶어서 대방군으로 이름을 변경하고 영역과 인구를 조금이나마 만회해서 280년의 대방군은 140년 대비 40% 수준으로 회복했습니다.



"한의 유민을 모아 군대를 일으켰다"는 표현은 거꾸로 말하면 그 전에는 낙랑/대방에 군대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있는 사실은 서기 37년 대무신왕이 낙랑을 멸망시킨 이후, 245년 고위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낙랑의 군사행동은 전혀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혹시 제가 모르는 군사행동이 있었다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1세기 후반~3세기 전반까지 요동에서는 고구려와 요동군/현도군 간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데, 낙랑은 잠잠합니다. 왜 그럴까요?



5) 고구려-위 전쟁의 재구성 (흥무대왕)



위 그림이 제가 생각하는 고구려-위 전쟁의 전체 모습입니다.


전쟁은 고구려-위 양국의 협공으로 공손연을 멸망시킨 후 서안평에 대한 고구려의 공격으로 시작되었고, 1차와 2차에 걸친 위의 공격이 진행되었습니다. 특히 2차 공격은 북쪽에서는 요동/현도군의 북군이 진격하고, 남쪽에서는 낙랑/대방군의 남군이 진격하는 양동작전의 형태로 진행이 되었는데, 고구려가 쫒기는 이때 백제가 황해도로 진격하여 고구려를 후방 지원하였고, 고구려 본진은 남쪽으로 이동하여 위의 남군을 꺾고 무사히 환도성으로 복귀하게 됩니다. 위의 북군은 엉뚱하게 북쪽 방향으로 추격하여 소득없이 귀환했습니다.


승패는 어땠을까요? 위는 고구려의 수도를 함락하고, 추격전을 벌였지만 얻은 것 없이 귀환했습니다. 고구려는 왕이 이리저리 피난다니는 수난을 겪었지만 무사히 귀환하고 침략군은 국경 밖으로 몰아냈습니다. 덤으로 현 북한 황해북도까지 통제 아래 두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양쪽의 주요 인물 중 동천왕, 밀우, 유옥구, 유유, 관구검, 왕기, 유무는 모두 살아있지만, 대방군수 왕준만 전사했네요. 저는 무승부로 봅니다.


낙랑/대방의 불내후 정벌과 기리영 전투는 고위전쟁 중의 일부 사건을 외전처럼 기록한 것이라고 보입니다. 낙랑군은 "예"지역까지 진격 했고, 또한 낙랑군은 기리영(황해도)에서 백제군과 싸웠습니다. 이 두가지 사실을 과장하여 기록한 것이 불내후 정벌과 기리영 전투의 본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리영전투에서 낙랑/대방이 과연 '한'을 '멸'했을까요? 저는 '멸'된 것은 낙랑이라고 봅니다. 실제로 멸망했다는 것이 아니라, 군사적으로 금치산자가 되지 않았나 추정합니다. (feat 신세계. 목숨만은 살려드릴께~)


한가지 의문점은 백제가 왜 고구려를 후방 지원 했는가 하는점인데, 여기에 대해서 나름 흥미로운 가설을 세우고 있고 추후 기회가 되면 별도의 발제글로 소개하겠습니다.


참고로 당시 양국의 군세가 어땟는지 추정 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추정에는 전체인구의 최대 5%를 군사로 동원한다고 가정합니다.


고구려 : 본국 6천명 + 동옥저 1천명 + 예 4천명 = 총 1만1천명

위 : 북군 모름 + 남군 1,800명

백제 : 당시 백제 인구는 모름. 하지만 마한 전체에서 지원군이 왔다면, 2만명 동원 가능 (한(韓) 전체 60만명, 마한 40만명, 진한 10만명, 변한 10만명)


문헌상에 나오는 군사수를 볼때는 위 숫자를 기억하시고 뻥인지 아닌지 추정해 보시기 바랍니다.



6) 고구려-위 전쟁의 재구성 (이승호)


위와 같이 제 뇌피셜 가설을 세우고 관련 자료들을 보던 중, "장병진, 고구려의 대방 지역 진출과 영역화 과정, 고구려발해학회, 2020" 논문의 참고문헌 중에서 흥미로운 논문을 만났습니다.



"이승호, 관구검기공비의 해석과 고구려위 전쟁의 재구성, 목간과 문자, 2015"



이 논문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 관구검기공비와 문헌을 분석하여 고위전쟁을 재구성함

- 고위전쟁은 224년~246년까지 총 3년간 2회에 걸쳐 진행됨

- 1차 전쟁은 224년~245년5월까지.

- 2차 전쟁은 245년8월~246년2월까지.

- 2차 전쟁은 위군이 두 방향에서 진격, 남옥저에서 벌어진 고구려군과 위군의 전투는 동천왕의 군대와 낙랑태수 유무가 이끄는 낙랑군 병력이 충돌


상당 부분이 제가 생각했던 전쟁의 전개와 일치합니다. 물론 제 생각과 차이점도 있습니다. 불내후 정벌이나 기리영전투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 전쟁의 결과 등. 하지만 244~246년의 전쟁을 하나의 흐름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반가왔습니다. 각종 사서의 연대가 혼란스럽게 느껴지시는 분들은 이 논문을 꼭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이런 좋은 논문을 커피 한잔 가격으로 구입하여 즉석에서 읽을 수 있다는 점은 축복이네요. 팀 버너스리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7) 결론


이제 결론입니다.

고위전쟁의 결과 낙랑/대방 지역은 군사적으로 무의미해졌고, 동천왕이 평양성을 쌓을 수 있는 환경은 조성되었다고 봅니다. 다만 알수 없는 모종의 이유로 천도 자체는 중단되고, 180년 후에나 천도가 진행됩니다.


고위전쟁과 관련된 특기사항들

- 위나라는 20년후에 멸망, 고구려의 300년을 더 번성함

- 고위전쟁 시 옥저지역에서 전투하던 고구려군의 일부가 신라로 남하하여 김씨왕통을 세움 (&lt;북사&gt; 기록 참고)

- 백제는 이후 대방지역과 모종의 협약을 맺으며 황해도로 진출


낙랑은 우리에게 무엇일까요? 처음엔 한반도의 지역명, 일정시기에는 한(漢)나라의 점령지,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된 이름입니다. 이번 공부를 통해서 낙랑을 발견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상의 글에 이견이 있거나, 제가 잘못 알고 있는 사항들, 추가로 봐야할 자료가 있다면 댓글 부탁 드립니다.

이 글은 논문이 아니기 때문에 "참고문헌"은 따로 남기지 않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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