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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윤내현교수)는 이 유적을 한사군의 낙랑군 유적으로 인식하도록 만든 대표적인 것 들을 검토하여 그 타당성 여부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封泥(봉니)가 있다. 평양에서 200점이 넘는 封泥(봉니)가 수집됬다고 하는데 그렇게 많은 封泥(봉니)가 한곳에서 수집된 예가 없어 처음부터 그것들 모두가 진품일것인지 의문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 의문점은 이미 정인보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지적된바 있는데, 필자는 그 전부를 위조로 보지는 않지만 상당수 위조품이 포함됬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樂浪大尹章(낙랑대윤장)”이라는 봉니가 있는데 大尹(대윤)은 王莽(왕망)시대의 관직명이다. 西漢(서한)시대에는 郡(군)을 다스리는 지방장관을 太守(태수)라고 하였는데 왕망시대에는 대윤으로 바꾸었다. 따라서 대윤이라는 관직명에 따르면 이 봉니는 왕망시대의 것처럼 보인다 . 그러나 왕망시대에는 서한시대에 사용하던 모든 군명을 개명했는데 낙랑군은 樂鮮郡(낙선군)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봉니가 왕망시대에 만들어 졌다면 “樂鮮大尹章(낙선대윤장)”이 되어야 한다. 군명과 관직명이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진품일수가 없는것이다
어떻든 이 봉니들은 土城(토성)부근에서 수집되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는
“樂浪太守章(낙랑태수장)”, “樂浪右尉(낙랑우위)”, **長印(**장인)“등이 있다. 西漢(서한)과 東漢(동한)의 관직을 보면 郡(군)에는 太守(태수)가 있었고 큰 縣(현)에는 丞(승)과 左.右尉(좌 우위)가 있었으며 작은 縣(현)에는 長(장)이 있었다. 그리고 漢書(한서) 地理(지리)지에 의하면 당시의 樂浪(낙랑)군에는 25개의 현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조선현과 **현이 있었다
따라서 봉니는 낙랑군 조선현 **현의 치소가 평양에 있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로 제시 되었다
그러나 주지하고 있는바와 같이 봉니는 공문서를 보낼대 봉함하는 것으로 사용하는것 이므로 봉니가 출토된 곳은 봉니의 주인이 보낸 공문서를 받은곳이 된다 . 따라서 봉니가 진품이라 하드라도 평양은 공문을 받은곳이 되지, 그들이 거주 하던 곳이 될수는 없는 것이다
둘째로, 봉니가 수집된 토성지역에서는 “大晉元康(대진원강)”, “樂浪禮官(낙랑예관)“, ”樂浪富貴(낙랑부귀)“등의 문자가 새겨진 기아가 출토되었는데 이것도 평양이 낙랑군의 치소였음을 알게하는 증거로 제시 되었는데, 여기서 대진원강은 西晉 惠帝(서진 혜제)의 연호로서 서기 291년부터 299년 사이가 된다. 따라서 이 기와 연대에 의하면 이 유적의 연대는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西漢(서한) 武帝(무제) 元封(원봉) 3년(기원전 108년)보다 400여 년이 뒤진 서기 290년대의 유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사군의 낙랑군유적으로 보기에는 연대가 맞지 않는다. 또 앞에서 언급한 봉니들의 書體(서체)에 대해서 정인보는 한시대의 것으로 보기에는 너무 정돈되 있음을 지적한바 있는데, 위의 기와에서 확인된 연대로 보아 봉니들도 한시대 보다는 훨씬 후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낙랑예관” “낙랑부귀”등은 평양이 낙랑이라고 불리어졌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한사군의 낙랑군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 될 수는 없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이 유적의 연대는 한사군의 설치 연대와는 크게 차이가 날뿐 아니라, 다음에 확인 되겠지만 지금의 평양지역에는 한사군의 낙랑군과는 다른 樂浪(낙랑)이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셋째로, 古墳群(고분군)이 있다. 평야에서는 중국식 고분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일부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하여 발굴되었다. 발굴자들은 그 위치와 墓制(묘제)로 보아 제1호분이 가장 오래된 것이며 규모가 가장 큰것 가운데 하나라 하였다. 따라서 발굴자들의 견해가 옳다면 평양의 중국식 고분은 모두가 제1호분 보다는 늦은 시기의 것이 된다
그런데 제1호분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는 貨泉(화천)이 있었다. 화천은 왕망시대에 주조된 것이다. 따라서 이 고분의 연대는 왕망시대 이전으로 올라갈수가 없다. 왕망시대는 불과 15년간 이었고 그 뒤는 東漢(동한)시대가 되므로 왕망시대에 주조된 화폐가 한반도에까지 도달된 시간을 감안하면 제1호분의 조성연대는 동한시대로 보아야한다 결국 고분군의 조성연대는 한사군의 설치연대 보다는 훨씬 늦은 것이다
넷째로, 왕광묘와 왕간묘에서 출토된 印章(인장)이 있다. 왕광묘에서는 “樂浪太守掾王光之印(낙랑태수연왕광지인)”,“ 臣光(신광)”, “王光私印(왕광사인)” 등의 목제인장이 출토되었고 왕간묘에서도 “五官掾王盰(오관연왕간)” , “王盰印信(왕간인신)” 등의 목제인장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태수연이나 오관연은 모두 군태수에게 속해있던 관리들로 이 인장들은 지금의 평양이 한사군의 낙랑군 치소였음을 알게하는 증거로 제시 되었다. 그런데 군태수에게 속해있던 관리들이 반드시 군치소에만 근무했던게 아니며 멀리떨어진 곳에서도 근무하는 경우를 배제해서는 안된다 다음에 밝혀지겠지만 평양에 있었던 낙랑은 한 때 행적적으로 낙랑군의 지시를 받는 屬縣(속현)과같은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관리인 태수연이나 오관연이 그곳에 근무하고 있었다는것이 낙랑군의 치소였다는 의미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이 고분의 연대이다. 인장의 서체에서도 그것이 서한시대보다 늦은 시기의 것임을 알수 있는데 왕간묘에서 명문이 있는 칠기가 출토되어 그 조성연대를 분명하게 해 주었다. 칠기 가운데는 “ 永平 十二年(영평12년)” 이라는 명문이 있는것이 있었는데 영평12년은 東漢 명제 때로서 서기 69년이 된다. 따라서 이 고분의 조성연대는 서기 69년 이전으로 올라갈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고분에서 출토된 목재를 이용하여 방사성탄소측정이 행해진바 있는데 그 결과는 서기 133년이었다. 결국 이 고분도 한사군이 설치된 서한시대의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늦은 동한시대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