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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낙랑군재평양설의 기반인 낙랑유적유물에 대한 검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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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위치에 대해 三國史記(삼국사기)와 帝王韻紀(제왕운기)에는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

“삼국사기” “ 고구려본기”에는 동천왕 21년 (서기 247)에 환도성이 난을 겪어 다시 도읍할수 없으므로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는데 ,평양은 본래 仙人(선인) 王儉(왕검)의 宅(택)으로서 왕의 도읍이었던 王儉(왕검)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평양이 당시 어느 지역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있다

다음에 밝혀지겠지만 동천왕 21년(서기 247)에는 지금의 평양지역에는 중국의 東漢(동한) 광무제에 의하여 설치된 낙랑(한사군의 낙랑군과는 다름)이 아직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동천왕 21년에 천도하였던 평양은 지금의 평양일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한사군이 설치 되어있던 시기에 지금의 평양지역에는 崔理(최리)의 樂浪國((낙랑국)이 있었던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김부식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인식하지 않았음을 알수있다. 결국 김부식이 고조선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로 인식했었다는 근거를 삼국사기에서는 찾을수가 없다

제왕운기에는 요동에 중국과는 다른 하나의 별천지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의 사방천리가 조선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고조선이 요동에 있었던 것으로 인식했었음을 알수있다

그러면서도 단군이 산신이 되었다는 아사달은 당시이 九月山(구월산)인데 弓忽(궁홀) 또는 三危(삼위)라고도 부른다고 주석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구월산을 황해도 구월산으로 인정한다면 이승휴는 고조선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로 보았고 요동을 한반도를 포괄한 지역으로 인식했다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제왕운기” “ 고구려기”에서 고구려가 마한의 왕검성에서 개국하였다고 기록하고 마한의 왕검성은 당시의 서경 즉 지금의 평양 이라고 주석 하였다. 즉 고구려가 마한의 왕검성에서 개국했다는 인식은 문제가 있지만 지금의 평양지역을 마한으로 보았으므로 고조선의 위치를 지금의 평양지역으로 보았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이승휴가 고조선의 아사달을 구월산으로 주석한 것은 당시 학자들의 견해를 참고로 반영시킨 것이거나, 황해도 구월산과는 다른 구월산이 고조선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어떻든 제왕운기 에서도 고조선의 위치를 지금의 평양으로 본 확증을 찾을수가 없다


그런데 “高麗史(고려사) ”地理志(지리지)“에 이르면

평양부는 본래 세 조선의 옛 도읍으로서 옛날 神人(신인)이 檀木(단목)의 아래로 내려오니 국인들이 그를 받들어 君主(군주)로 삼아 평양에 도읍하고 號(호)를 檀君(단군)이라 하니 이것이 前朝鮮(전조선)이요, 西周(서주)왕국의 무왕이 商(상)왕국을 멸망시키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이것이 후조선이다. 그 후 41대 후손인 準(준)때에 燕(연)인 위만이 망명하여 와서 1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 준의 땅을 공탈하고 왕검성에 도읍하니 이것이 위만조선이다

라고 하였다 이와같이 고려사에서는 지금의 평양이 고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도읍지였다고 단정하고 이 세 조선은 같은 지역에서 계승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인식하였다. 이것은 조선시대 초기의 한극고대사 인식태도를 대표한 것으로 볼수있는데 그 후 이러한 인식태도가 조선시대 전기간을 통하여 학계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기자조선의 존재는 부정하면서도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도읍지를 지금의 평양으로 보는것은 한국역사학계의 통설로 되어 있다

이는 삼국사기가 편찬된 고려중기 이래 구한말로부터 일제시대에 걸쳐 근대사학이 성립될때까지 유교사관에 바탕을 둔 것이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한국이 유교문화권에 편입되고 영토가 반도로 축소된 후대의 역사경험은 자연히 고대의 역사경험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유교라는 새로운 가치체계를 가지고 인식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기자가 주목되고 중세적 세계질서로서 事大(사대)관계가 존중되며, 그 결과 사대관계가 형성된 이후의 현강토인 반도를 失地(실지)인 만주보다 더 중시하는 새로운 학국사 인식의 성립을 보게된 것이다

이러한 학계의 분위기 속에서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지금의 평양지역에서 중국식 유적이 발굴되어 西漢(서한)의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설한 한사군의 낙랑군 유적일 것으로 보고 됨으로서, 그것은 고조선. 위만조선의 도읍을 지금의 평양으로 보는 데 적극적인 고고학적 근거가 되었다

옛 문헌들은 위만조선이 고조선지역에 있었고 한사군이 위만조선 지역에 설치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선후관계가 부정되지 않고 평양의 중국식 유적이 한사군의 낙랑군 유적임에 틀림없다면 지금의 평양이 고조선의 중심지였음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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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흥무대왕님의 댓글

글이 너무 길고 도배성이네요...
동일 주제를 여러 발제글로 올리지 마시고, txt 파일로 만들어서 첨부하면 어떨까요? 본문에는 그 글의 요약과 울티마툴레님의 의견을 밝히면 좋겠네요.

울티마툴레님의 댓글의 댓글

이어진 글인데 폰으로 복사하다보니 한계가 있네요. 피씨에서 통합해봐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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