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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신라본기 왜(倭)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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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시간이 생겨서 삼국사기 3대 미스터리 세력 중 하나인 신라본기의 왜에 대해서 좀 더 고민해 봤습니다. 

(1. 백제/신라본기의 말갈, 2. 신라본기의 왜, 3. 고구려본기의 마한)


신라본기의 왜에 대해서 아마도 많은 분들이 의문을 갖고 있을 듯 한데, 인터넷에 올라온 기존 의견을 찾아보니 왜의 정체에 대해서 크게 2가지로 나뉘네요. 하나는 왜를 일본 열도의 정치 세력으로 보고 있고(통설), 다른 하나는 왜를 부산 지역의 정치세력(임나)으로 보고 있습니다 (김상설).


저는 왜로 표현된 세력이 전라도 지역의 정치세력이 아닐까 하는 결론에 도달했는데, 제 결론이 얼마나 가능성이 있는지 함께 보시죠.


먼저 신라본기에 왜를 언급한 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내용은 첨부 파일로도 올려놨으니 필요한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총 49건의 왜 관련 기록이 있는데, 이를 도식화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 엑셀 자료에는 왜가 언급되지 않은 기사(297년, 유례이사금 14년조)를 하나 추가 했는데, 이는 뒤에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왜의 침공과 교류에 따른 시기를 구분해 보면 위와 같이 a,b,c,d,e 기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중 a기간에 해당하는 1~2세기의 기사는 신뢰성에 대해서 의문이 많이 제기 되고 있습니다. 후대의 사건을 모종의 이유때문에 앞으로 당겨서 기록했다고 보는 관점이 많고, 실제 1~2세기 신라의 소국 정벌 기사들은 고고학적으로 3세기말~4세기초의 사건으로 보여집니다. 따라서 비슷한 맥락에서 1~2세기의 왜 관련 기사들은 3세기에 발생한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해 보이지만, 기년을 함부로 변경할 수 없으므로 일단 기사 자체를 삭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남은 것은 c, d, e 기간입니다. 각 시기의 특징을 간단히 보면 c 기간은 왜의 침공이 빈번했고, d 기간은 왜와 교류의 시기, e 기간은 왜의 침공이 빈번해 진 시기입니다. 이 그림을 보면 각 기간에 침공과 교섭이 일정기간 유지되며 마치 왜국/왜인/왜병이 단일 명령체계에 복속하는 일사분란한 정치체로 보입니다. 게다가 수차례 수도까지 포위한 이 침공 기록을 단순히 해적들의 약탈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400년 전후의 기록들은 그 전형에서 벗어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따로 논의 하겠습니다.


​삼국사기 기록과 당시 정황에 근거하여 각 기간의 전환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 c 기간(3세기)에 왜국이 침공을 시작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특이한 점은 174년 큐슈지역의 왜 여왕 히미코(비미호)가 신라와 우호 관계를 맺었는데, 히미코의 집권기간(173~247년)에도 침공이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이 때 침공한 왜인들은 히미코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세력이라는 뜻이겠죠.


c 에서 d 기간으로 넘어간 이유에 대해서 한가지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 할 수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297년 유례이사금 14년조 기사를 보면, 이서고국이 금성을 공격했는데 신라가 물리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죽엽군이 나타나서 적군을 물리친 것으로 나옵니다. 죽엽군 얘기는 패배한 신라인들의 염원이 담긴 설화로 생각되므로 이서고국이 신라의 수도를 함락하는 데 성공하고, 신라를 속국 또는 부용국으로 만들고 철수한 것이 아닌가 추정합니다. 따라서 이서고국이 왜국이거나 왜에 소속된 국으로 보입니다.


이후 50여년간 신라와 왜는 혼인도 하고, 침략 없이 평화롭게 지내다가 344년 신라가 왜국의 혼인 요청을 거절한 후 다시 왜의 침공이 시작됩니다. 따라서 d 에서 e로 넘어간 이유는 명확합니다.


e기간의 특이한 점은 미사흔과 관련된 기사들(402, 418년)인데, 미사흔을 인질로 잡고 수교했으면 왜의 침공이 멈췄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은 미사흔을 인질로 잡은 정치 세력과 침공을 진행하는 정치세력이 서로 독립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미사흔을 인질로 잡은 세력은 누구이며, 침공 세력은 누구였을까요?


가장 미스테리는 500년 이후 왜의 침공이 사라진 것입니다. 침공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기록 자체가 사라졌고, 이후 등장하는 왜는 7세기 이후의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입니다.



이제 왜의 침공 경로와 위치에 대해서 추정해 보겠습니다.


통설에서는 왜의 침공이 여름(음력 4~6월)에 집중 되었기 때문에 바다를 통한 침공이라고 보고 있는데, 저도 동의합니다. 그 이유는 여름이 가장 항해하기 안전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봄은 영등철(음력2월)로 대표되는 날씨인데 강한 바람과 차가운 기온, 변덕스러운 날씨가 항해를 어렵게 하고, 가을은 태풍이 오기 때문에 출항하기에는 조심스러운 시기입니다. 가장 안정적으로 운항을 할 수 있는 시기는 여름이니 그때 침공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일부 의견처럼 침공을 남풍에만 의지했다면, 귀향은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네요. 따라서 바람의 방향은 침공과 무관하다고 봅니다.



바다를 통한 침공 경로는 위의 그림과 같이 A, B, C 경로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C경로는 육로로 침공하는 것이 효율적이니 가능성이 낮습니다. 실제 기록도 그러하고.


B경로는 2~5세기에 큐슈지역에 신라를 침공할 만한 독자 세력은 없다고 보기 때문에 가능성이 낮습니다. 기내 지역에서의 침공은 너무 멀어서 비상식적이고, 기내지역이 큐슈를 통합하는 것은 6세기 초의 일이니 본 건과 무관합니다. 게다가 대한해협이 소문난 거친 바다라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합니다.


남은 것은 A경로인데, 저는 이것이 신라본기의 왜의 침공 경로이고 전라도 세력을 왜라고 표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전라도 지역에서 경주지역으로 육로로 침공하지 말라는 법이 없으나, 태백산맥이라는 자연적 방벽과 전라도-경주 간에 여러 소국들이 존재하는 것을 감안한다면, 기습 공격은 해로가 가장 효과적이라고 보입니다.




위 지도는 고고학적으로 드러난 3세기 중반의 각 정치체 권역입니다.


마한의 일개 소국이었던 백제는 이제 막 경기도 전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한 상태이고, 남한지역의 전통적 강자였던 마한은 금강, 만경강, 영산강, 섬진강 유역에서 건재하며, 변진한은 경상도에 자리잡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소국으로 흩어져있던 남한이 백제와 신라라는 구심점을 중심으로 재편되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이 시기 마한에 올망졸망한 소국만 있었던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마한의 북부지역과 진한 지역이 고대국가로의 변화를 시작한 이때 과연 마한 중남부지역은 소국 형태로만 남아있었을까요? 진한(사로국)의 손을 잡고 서진에 사신을 파견한 "마한"이 과연 "백제"였을까요? 아니면 마한 소국 중 영향력이 있는 중심국이었을까요? 만일 <진서>의 마한이 "마한"이라면, 마한 입장에서는 변한과 진한(사로국)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고자 하는 의도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것이 3세기 "왜국"의 침공으로 신라본기에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것이 갑작스레 시작된 3세기 c시기의 왜국 침공의 이유라고 보여지며, 큐슈지역의 히미코가 통제할 수 없었던 군사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서고국은 마한의 중심국이든지, 중심국의 사주를 받은 다른 소국일 가능성도 있다고 보이네요. 그리고 330년에 신라본기에 뜬금없이 등장하는 벽골지 축조 기사도 설명이 가능해 보입니다. 마한 주도의 벽골지 공사에 속국이 된 신라가 노동력을 제공했고, 이를 기록에 남긴것으로 볼 수 있겠네요.




e기간 중 5세기 초의 상황은 좀 더 복잡해 보입니다.


4세기말 광개토왕의 남정이 백제 뿐 아니라 마한을 타격했고, 그 세력 중 일부가 일본열도로 망명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보여집니다. 일본 열도로 망명한 세력이 미사흔을 인질로 잡은 왜국이고, 남아있는 세력이 지속적인 침공을 하는 왜라면 교섭과 침공의 엇갈림이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그리고 5세기 내내 이어지는 왜의 침공은 전라도에 남아있는 약화되어 가는 세력의 헛된 시도라 보여집니다. 웅진 천도 이후 5세기 말에 전북지역까지 백제의 영향권으로 포섭되면서 결국에는 대 신라 관계는 백제의 전략(나제동맹)에 따라 움직이게 되고, 이로 인해 더이상 "왜"의 침공은 신라본기에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합니다.




지금까지 정리한 가설 또는 뇌피셜에는 여러가지 약점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약점은 과연 3~5세기의 마한에 전체 마한권역을 일사불란하게 통제할 만한 중심국이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고고학적으로는 부정적으로 보여지는데 앞으로의 고고학 성과와 연구를 더 지켜봐야겠습니다.


또다른 약점은 5세기초 기내지역에 갑자기 등장한 전방후원분 세력이 과연 마한지역과 고고학적으로 연결이 가능한가 하는 점입니다. 그밖에도 여러 약점이 있겠지만 이 두가지가 가장 핵심적인 취약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가설을 세워본 것은 신라본기에 나타난 왜의 침공과 교섭의 기록이 큐슈 왜 또는 기내 왜를 상정해서는 여러가지로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제가 새로운 가설을 얘기할 때마다 반복해서 말씀 드리지만, 저도 "이것이 진리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측면으로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니 너무 심각한 댓글을 다시면 곤란합니다. 반증이 나온다면 가설은 계속 수정, 폐기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글을 읽은 미래의 역사학자에게 작은 자극이라도 되길 바랄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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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1

흥무대왕님의 댓글

정리하면 신라본기에 왜로 표현된 세력은 크게 3개로 볼 수 있습니다.

1. 큐슈 지역의 왜 = 히미코 세력 (173년 기사)
2. 기내 지역의 왜 = 광개토왕의 남정을 피해 기내로 이동한 일부 마한 세력 (미사흔을 인질로 잡은) (402, 418년 기사)
3. 전라도 지역 = 마한 (나머지 모든 기사)

울티마툴레님의 댓글

1,2세기를 삭제하면 고고학적 증거와 삼국사기의 대동소이함을 설명할 수없다고 봅니다.
신라본기 왜는 분명히 부산과 대마도 큐슈를 근거지로한 해상세력이며 이것을 김상교수는 임나가야로 본 것이란건 흥무대왕님도 잘아시는거구여

울티마툴레님의 댓글

4세기말,5세기초 왜는 분명히 쿠슈+기내 왜입니다만 그들의 정체가 김상교수가 말하는 삼한백제인지 아닌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한반도 도래인은 맞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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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무대왕님의 댓글의 댓글

5세기 내내 신라를 침공하다가 서기 500년에 기록이 사라지는 왜는 누구로 보시는건가요?
그 이유는 또 어떻게 판단하시는지?

울티마툴레님의 댓글의 댓글

신라를 침공한 왜는 임나가야가 맞다고 보며 이에 대해선 김상교수가 전개한 가설이 전적으로 옳다고 봅니다

흥무대왕님의 댓글의 댓글

부산 말씀이시죠?
부산은 고고학적으로 이미 4세기에 신라에 편입되었는데 이 부분은 어떻게 이해하고 계신가요?

흥무대왕님의 댓글의 댓글

부산이 4세기에 편입된 후로 5세기, 6세기를 거치며 점점 신라 유물에 동화되는 경향인데 무슨 근거로 "없어졌다"고 보시나요?

게다가 신라본기의 왜는 2~5세기 동안 꾸준히 침공을 지속했고요. 동일 세력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울티마툴레님의 댓글

그리고 영산강유역의 세력은 고고학적으로도 분명히 5세기이전에는 그리큰 세력은 아니었습니다. 섬진강유역일대에 가야세력이 확산되었는데 영산강까지는 못갔습니다.  영산강유역의 세력은 분명 삼한백제의 세력권이었는데 출신은 "졸본부여"를 비롯한 수많은 부여민으로 보는게 지리적으로 맞다고 봅니다.  고구려의 건국세력에 항거해 배타고 해안을 따라 이동한 부여인이라고 봅니다. 비류와 온조, 소서노가 먼저 선빵을 쳤고 그뒤를 따라 수많은 항거세력이 남하했다고 봅니다

흥무대왕님의 댓글의 댓글

영산강유역의 5세기 이전 고고학 기록에 대해서 정보가 있으면 공유 부탁 드립니다.

저도 찾고 있는 중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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