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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왕 마한정벌설 비판 보충 글 1. (feat. 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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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왕 마한정벌설 비판 글을 정리하던 과정에서 제가 확실치 않은 가설을 바탕으로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실수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문제의식을 갖는 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확신하지 못하는 가설을 바탕으로 대안을 제시하는 건 섣부른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앞으로는 문제 제기 위주로 글을 작성하고, 그에 대한 대안은 논리적으로 완결되어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가설만 얘기하겠습니다.


​이것저것 자료를 찾다보니 확인해야 할 항목이 점차 늘어나고 있어서, 먼저 몇가지 기본적인 사항들부터 짚고 가는게 좋을 듯 하여 관련 내용을 올립니다.


1. 마한이란 무엇인가?

2. 문헌사학계와 고고학계가 바라보는 근초고왕 마한정벌설에 대한 입장 차이

3. 3~4세기 백제의 영역은 어디까지인가?

4. 백제의 영역 확장에 따른 마한 주민의 일본 이주 가능성



이번 글에서는 1~3번 항목을 하나씩 보겠습니다.



1. 마한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마한은 한강과 금강,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한반도 중서남부 지역에 자리하였던 고대 연맹체입니다.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마한에 대한 기록이 명확치 않다는 점과 고고학 성과는 좀 다른 얘기를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전남지역은 아래 그림과 같이 3세기 후반 ~ 6세기 전반까지 대형 분구와 옹관고분 문화로 대표되는 독자적인 정치세력권을 상정할 수 있습니다.



문헌에 나오는 마한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시공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다양한 경우가 나옵니다.


a. <삼국사기> 온조왕조 마한 멸망 기록 : 초기 백제와 자웅을 겨루던 마한 소국, 또는 목지국 등 특정 정치체(시기 불명)

b. <삼국지> 위지동이전 : 경기-충청-전라지역에 분포한 50여개의 소국으로 구성한 마한연맹체 (3세기)

c. <진서>의 서진 교류 세력 : 서울-경기-충남 서부에 위치한 백제국 중심의 마한연맹체 - 서진 유물의 출토지역 (3세기 후반)

d. <진서> 장한전의 동이마한신미제국(東夷馬韓新彌諸國) : 영산강유역세력 추정 (3세기 후반, 위 그림?)

e. <송서> 왜오왕이 관작을 청한 모한(慕韓) : 지역적 개념. a,b,c와 별개의 존재? (5세기)

f. 남한 지역 중 진한·변한을 제외한 모든 지역 (일반적 정의. 시간대 특정이 어려움)


마한이라는 용어는 이렇게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어느 경우에는 정치체를, 어느 경우에는 지역적 범위를 의미하기도 하고 사건과 기록에 따른 시간대도 다양합니다(양성혁/정현 2021). 따라서 저 같은 동호인이 논문이나 자료에서 마한이라는 용어를 만날 때는 맥락에 따라 시공간을 특정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2. 문헌사학계와 고고학계가 바라보는 근초고왕 마한정벌설에 대한 입장 차이


근초고왕의 마한정벌에 대해 문헌사학계와 고고학계는 서로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마한은 1항의 f 용례).


문헌사학계는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249년)에 나오는 남해안 지역의 평정기사에서 주체를 왜에서 백제로 바꾸고 2주갑 하향하여 369년 근초고왕 때의 일로 보는 것이 주류적 시각입니다. 또한 삼국사기 온조왕 27년(서기 9년)의 마한 멸망 기사를 6주갑 하향하면 역시 369년이 나오므로 이 또한 하나의 근거로 보기도 합니다. 또다른 근거로는 369년 이후에는 어느 문헌에도 마한이라는 용어가 나오지 않음을 들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고고학계에서는 오히려 4세기 후반 영산강유역의 독자적인 문화가 백제 중앙과 차별화가 더욱 심화되는 양상을 띄고 있어서 문헌사학계의 통설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산강유역은 6세기 중엽 이후 비로소 백제의 지방으로 완전히 편입되었다는 것이 고고학계의 일반적 시각입니다(양성혁/정현 2021).


​물론 문헌사학계 내부에도 통설과 다른 의견(정동준 2019)이 있기에 앞으로 두 학계의 의견이 수렴할 가능성은 있다고 보입니다.



3. 3~4세기 백제의 영역은 어디까지인가?


문헌사학계나 고고학계 모두 3세기말 백제의 남계를 경기남부의 안성천으로 보고 있습니다.


​4세기 백제의 영역은 논란이 있는데, 2항에서 본 바와 같이 문헌사학계는 남해안까지를 남계로 보고 있고 고고학계에서는 전북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동진강을 그 남계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문헌사학계의 주류시각 '4세기 영역화설'를 제외한 다른 견해에 대해서 조금 더 나눠서 얘기하면...


4세기에 금강까지 백제의 영역이 확대된 것으로 보는 데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동의합니다.


금강에서 노령산맥까지의 지역은 <위서><남제서>의 백제전을 근거로 5세기 이후에도 백제가 영역화를 관철하지 못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5세기말에는 영역화 되었을것으로 보는게 일반적입니다.


노령산맥 이남의 영산강 유역의 통합시기는 문헌적으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 20년(498년)을 계기로 보는 견해가 있고, 또다른 견해로는 520년경 22담로가 530년경 성왕대에 37군으로 재편되었을 것이며 이때가 통합시기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정동준 2019, 임영진 2013). 대략 5세기말~6세기 중엽 정도인데, 이때 고고학적으로 특이할 점은 영산강유역에 전방후원분이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연구 결과에 개인적으로 한가지 더 궁금한 사항이 있습니다. 1항의 마한 개념 정의 c,d 항목을 보면 3세기 후반에 충청 내륙과 금강중하류 지역은 공백으로 보입니다. 이 지역을 이른바 "금강세력"으로 볼 수 있는데, 막연히 4세기 또는 근초고왕 대로 얘기되고 있는데 이곳이 언제 백제 영역화 되었는가 하는 문헌적, 고고학적 근거에 대해서는 추가로 자료를 찾아봐야 할 것 같지만, 현재까지 확인한 바로는 고고학적으로 단서가 되는 지표는 주구토광묘와 마형대구 2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위 두 그림에서 보듯이 경기남부와 충청 내륙권은 주구토광묘라는 고유의 묘제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주구토광묘는 기원후 2세기를 전후하여 등장하여 4세기말경 백제의 문화권에 흡수되어 사라지게 됩니다(김낙중 2021, 정태영 2019).​​



마형대구는 말 모양을 한 허리띠 고리입니다. 마형대구는 기원전후 대구,경주 지역에서 출현하기 시작하며, 2세기후반~3세기 전반경에 경주지역에서 중서부지역으로 확산되며 경주지역에서는 소멸되고, 4세기전반~5세기전반에 중서부지역에서도 쇠퇴하게 됩니다(박장호 2011, 김중엽 2021).


주구토광묘와 마형대구의 분포를 감안하면 2~4세기 충청 내륙, 금강중하류 지역에는 백제와 별개의 독립된 정치세력이 있었고, 4세기말경 백제에 통합되었다고 추정됩니다. 이 통합이 정벌과 폭력으로 진행되었는지, 자발적이고 평화적인 방식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충청 내륙과 금강중하류 지역을 별개의 세력권으로 봐야하는지도 더 살펴볼 부분입니다.




이번 글은 여기서 마치고 다음 글에서 4번 항목에 대해서 논의해 보겠습니다.



* 참고문헌

김낙중. 2021. "영산강유역권 마한 관련 유적의 최신 조사 성과와 의의." 湖南考古學報 67 (-): 136-169.

김중엽. 2021. "원삼국시대 마형대구(馬形帶鉤)의 의미에 관한 고찰." 馬韓, 百濟文化 37 (-): 120-142.

박장호. 2011. "原三國期 動物形帶鉤의 전개와 의미." 국내석사학위논문, 영남대학교 대학원.

양성혁,정현. 2021. "영산강유역 고대 정치체에 대한 다양한 시각." 고고학지 제27집, 국립중앙박물관.

임영진. 2013. "고고학에서 본 전남지역 마한과 백제." "백제, 마한과 하나되다". 한성백제박물관.

정동준. 2019. "문헌사료로 본 백제의 마한 통합과정." 백제학보 0 (29): 5-30.

정태영. 2019. "중서부지역 주구토광묘의 전개양상과 성격." 국내석사학위논문, 목포대학교.



* 추신

정리하다 보니 근초고왕 마한정벌 가설에는 설명이 필요해 보이는 부분이 2개 있습니다. 첫째는 369년의 왜(이 왜를 야마토정권의 전신으로 본다면)는 어째서 백제에 부역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기나이 지역에서 멀리 남해안까지 백제의 전쟁에 동원되어 왜가 얻은 것이 무엇일까요? 두번째는 369년에 왜를 동원할 정도로 강력했던 백제가 28년만인 397년에 왜로 왕자를 볼모로 보냅니다. 이러한 극적인 관계전환이 가능한 건 광개토왕의 396년(영락6년, 병신년) 남정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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