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료 분류

광개토왕비의 재해석과 영락6년 남진 상황

컨텐츠 정보

  • 635 조회
  • 0 추천
  • 0 비추천
  • 목록

본문

최근 4~6세기 한반도 남부사를 계속해서 공부하고 있는데, 396년(영락6년, 병신년)의 고구려 남진과 관련해서 원인, 진행상황, 결과, 영향에 대해서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개인적으로 영락6년의 기사를 꽤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 글의 말미에 언급하겠습니다.


먼저 영락6년의 남진 원인에 대해서 확인하기 위해 광개토왕비의 신묘년(392년) 기사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남진 원인은 멀리보면 4세기 들어 대방고지를 둘러싸고 격화되어온 고구려-백제의 충돌이겠지만, 고구려가 제시하는 남진의 직접적인 원인은 신묘년 기사입니다. 신묘년 기사는 수많은 해석과 논란을 낳았는데, 최근에 이를 합리적으로 재해석하는 논문(최연식, 2020)이 발표되어 소개 드립니다. 기존의 다른 해석들을 모두 언급하는 건 불필요한 일로 보이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기존 해석에 관심있는 분들은 본 논문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최연식은 기사 전체의 맥락과 한문 문법적 측면에서 검토하고, 신묘년 기사의 한문을 아래와 같이 판독합니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破, 百殘▨▨(新)羅, 以爲臣民.’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백잔(백제)과 신라는 예부터 속민으로 계속 조공하였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破에 건너오자 백제는 (왜와 함께)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으려 하였다.’



'▨破'를 지명으로 보고 있는데, 신묘년 기사를 이렇게 판독하고 해석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신묘년 기사는 병신년 남진의 원인을 기술하였음. 따라서 백제를 정벌한 이유가 나와야 함

2. 기존의 해석들은 신묘년 기사 내부의 문장들이 서로 순조롭게 연결되지 않음

3. 來·渡·破 등의 글자에 대한 기존 해석이 문법에 맞지 않는다는 점

4. <광개토왕비> 전체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4자구를 기본으로 하는 문장 형식을 고려



저는 이 해석이 기존 해석들이 갖고 있던 문제점들을 잘 피해가는 상당히 설득력있는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해석을 취한다면 궁금한 점은 단 한가지입니다.


왜가 신묘년에 건너와서 백제와 모종의 관계를 맺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고 그 전후 맥락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현재로서는 누구도 답할 수 없다고 생각되니, 일단 가슴에 묻어두고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고대사 공부를 하며 가슴에 묻어둔 질문이 너무 많네요. ㅎㅎ).




다음은 영락6년 남진의 진행상황입니다. 이 부분은 박종서(2022)를 참고하여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전통적인 평양-서울간 교통로




2. 392년에 고구려가 공취한 관미성 - 고구려와 백제 모두의 요충지



3. 394년에 고구려가 구축한 국남 7성 - 예성강 以西 지역에서 평양으로 향하는 재령로와 자비령로 선상의 종심방어체계



4. 396년 고구려의 남진 공격로



5. 396년에 정벌한 58성 700촌



박종서(2022)에 따르면 58성 중 1그룹은 392년 이전 고구려가 획득한 지역이며, 전체 그룹은 대체로 한강 하류와 경기 남부지역, 강원도 영서지역과 북한강 수계 지역까지 진출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건 숫자로만 보면 396년의 공략이 백제에 심대한 타격을 준 것으로 보이지만, 그 후에 일어난 사건들을 보면 그렇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전쟁 직후 광개토왕은 백제 아신왕의 항복과 동시에 그와 城下의 盟을 맺고 王弟, 大臣 등 수많은 인질을 데리고 철군하였습니다.


저자는 철군의 이유를 고구려의 대외정책에 따른 것으로 보고 있는데, 즉 백제를 효과적으로 제압해 남쪽 국경을 안정시키고 북쪽으로 후연과 거란에 대치하는 방향으로 전개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백제가 396년에 제압된 후에도 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수도가 한성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물론이고 398년에는 아신왕이 북벌을 계획하고, 399년에는 군사와 말을 징발했으며, 403년에는 신라를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고구려는 409년에 국동6성을 쌓아 백제의 공격에 대비합니다. 즉, 백제-고구려 관계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6. 국동 6성 위치도 - 고구려의 방원령로 방어 강화




이상으로 396년 전쟁을 살펴봤는데 간단히 요약하면, 고구려가 북쪽 세력 대응에 집중하기 위해 남쪽을 안정시키는 목적으로 벌인 전쟁으로 전쟁에는 승리했으나 백제에 크게 타격을 주지 못한 일회성 전과였다고 보여집니다.



제가 이 전쟁을 중요하게 본 것은 비류백제설 때문입니다. 비류백제설의 핵심은 "금강유역에 자리한 비류백제가 광개토왕의 남정에 심대한 타격을 입고, 일본열도의 기나이로 망명해서 야마토 정권을 수립했다"입니다.


문제는 광개토왕의 남정(396년)은 금강 유역에는 가지도 못했고, 백제에 심대한 타격을 주지도 못했기 때문에 (만일 존재했다면) 비류백제에는 더욱더 타격을 주지 못했을 거라는 점입니다. 비류백제설의 약점에 대해서 이런저런 항목들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396년 전쟁에 대해서 더 공부해 보니 이 전쟁이 가장 치명적인 반론이라고 생각되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류백제설"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가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비류백제설이 한반도 남부와 일본 열도간의 끈끈한 관계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불러 일으킨 매력적인 가설이라고 생각합니다. ^^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참고자료

박종서. 2022. "高句麗 南進 硏究." 국내박사학위논문, 단국대학교 대학원.

최연식. 2020. "永樂 6년 고구려의 백제 침공 원인에 대한 검토 - 〈廣開土王碑〉 辛卯年 기사의 재해석을 중심으로 -." 목간과 문자 0 (24): 251-273.



--

추신.

- 도대체 신묘년에 왜와 백제는 무슨 짓을 한걸까요? ㅋㅋ

- 그리고 그 왜는 누구일까요?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318 / 1 페이지
번호
제목
이름
전체 318 / 1 페이지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