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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로 보는 한국 고대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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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시대 이후 삼국시대로 정의했지만, 정확히 얘기하면 위만조선 멸망 시점인 기원전 107년부터 신라 건국 시점인 기원전 57년까지 50년간은 시대 구분상 공백인 셈입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전신으로 볼 수 있는 고구려사회가 이미 기원전 3세기부터 확인되고 있고, 한군현과 고구려의 투쟁이 이 50년의 공백기를 메우고 있으니 기원전 107년부터 삼국시대로 포함하여 정리하겠습니다.


​아래의 내용은 모두 제가 예전에 올린 글에서 다룬 부분이므로 보충 설명은 생략하고 자료만 올리는 것으로 갈음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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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미천왕 "(서기 302년) 현도군을 침략하여 8,000명을 포로로 잡아 이들을 평양으로 옮겼다."


이 기사는 낙랑군이 한반도 내에서 교치되었을 거라는 제 가설의 근거 중 하나입니다. 낙랑군의 멸망이 312년임을 감안하면 멸망 10년전에 이미 낙랑군은 평양에 없었고, 어디론가 교치되었다고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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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에 대해서는 보충 설명이 필요합니다. 저는 "방2천리"를 사방 2천리로 해석하여 영역을 그렸는데, 이후 더 확인해 보니 "방2천리"는 "사각형 각 변이 2천리"라는 의미로 보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 숫자를 적용한다면 면적은 위 그림의 16배씩 늘어나서 도저히 현실적인 숫자가 나올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절대 거리 값은 오차를 인정하고 상대적인 면적만 취하는 방식으로 위 그림을 바라보는 게 현실적이라고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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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는 상당히 흥미로운데, 서기 300년경에 고이왕~계왕으로 이어지던 우씨 왕통(말갈계)이 비류왕으로 시작되는 해씨 왕통으로 다시 복귀합니다. 그동안 비류왕 계통을 해씨 왕통의 복귀로 생각했는데, 혹시 직전 왕들인 책계왕과 분서왕이 전사하는 바람에 우씨 왕통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백제와 통합된 금강 유역의 부여씨 가문이 왕권을 장악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 올랐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진서> 본기에 나타나는 386년의 백제왕 '여휘'가 자연스럽게 설명됩니다. 또한 이 비류왕은 건국 초기의 비류 설화에 투영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드는데, 학계에서는 300년경 백제가 충남 지역으로 확장한 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검토해 봐야겠습니다.


아직 아이디어 차원에 불과하지만 이 또한 개인적인 장기 과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상으로 그동안 정리해온 내용을 마무리 짓고자 합니다. <진국>의 위치에 대한 소박한 호기심에서 시작한 공부가 2년에 걸쳐 여러번 방향을 바꾸면서 예기치 못한 곳까지 절 데려왔네요.

제 가설이 모두 맞는지는 저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분명히 말씀 드릴수 있는 것은 이 글을 읽는 회원님들께서도 모든 주장에 대해서 열린 마음으로 경청하고, 늘 의심하고, 스스로 검증하고, 시공간의 연속성을 감안하며 역사를 바라보신다면 좀 더 흥미로운 관점을 만나실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일일이 호명하긴 어렵지만 가생이 시절부터 많은 정보 제공과 격려를 통해 공부를 해 나갈 수 있게 도와주신 여러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새로운 앎이 찾아올 때 다시 글을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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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6

울티마툴레님의 댓글

간만입니다.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일단 님의 한사군비정이 틀렸다고 봅니다. 님이 이런 주장을 하려면 북한에서 발행한 낙랑국유적유물에 관한 책자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여야합니다. 보셨는지 모르겠지만요

처음엔 응원했지만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결국 부흥카페관점으로 회귀하셨네요.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준왕조선같은 가공의 개념을 너무 깊이 파고든 결과같습니다. 조선이라는 지명과 국명을 혼동하신거같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나온 말로 끝맺음합니다. 연국은 가장 약소국으로 망할때까지 소왕때 일이십년 제외하곤 망할 걱정에 잠못이루었다

울티마툴레님의 댓글

“염철론”의 “伐功(벌공)”편에서는 “연국은 東胡(동호)를 물리치고 1천 리의 땅을 넓혔으며 요동을 지나 조선을 침공하였다. ”고 전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기 흉노열전”과 ‘위략“에 보이는 진개의 침략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만약 진개가 고조선의 영토를 침공하여 그것을 확보하고 있었다면 연국의 국경은 동쪽으로 크게 이동되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철론 험고“편에서는 연국의 국경은 碣石(갈석). 邪谷(사곡), 요수였다 고 밝히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진개의 전쟁이 일시적인 침략행위에 불과했고 다시 후퇴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진개전쟁의 실체입니다. 님주장에 앞서 만번한의 위치비정을 설득력있게 하시기 바랍니다

울티마툴레님의 댓글

사마천의 사기에 보면
실제로 전국시대에 연국시대에 연국보다는 제국이 강대국이었는데 제국은 지금의 산동성지역이었다. 그런데 종래의 통설처럼 연국이 압록강을 고조선과의 국경으로 삼고있었다면 연국은 제국의 두 배 정도의 대국 이어야 한다. 이것은 전국시대의 상황과 부합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사마천은 ‘사기“에서 ”연국은 북쪽으로 蠻貊(만맥)의 압력을 받았고, 안으로는 제국. 진국과 국경을 함께하여 강국들 사이에 끼어 있던 변방의 가장 약하고 작은 나라로서 여러번 멸망할 위험을 겪었다“고 말하여 연국을 약소국으로만 표현하고 진개의 고조선 침략은 언급하지도 않았다는 점도 참고되어야 한다.

이상과 같은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전국시대에 진개의 고조선 침략으로 연국에 복속되었다는 진번과 조선은 지금의 난하 유역에 있었던 지명일 수밖에 없게된다. 그리고 “염철론 주진”편에서 언급된 진국이 중국을 통일한 후에 패수(지금의 난하)를 건너 토벌하였다는 조선도 그 기록이 옳다면 지금의 난하 동부연안에 있어야 한다. 진국은 중국을 통일한후 도망한 연왕 희를 붙잡기 위하여 장수 왕분의 인솔 아래 요동을 친 일이 있으며, 장수 蒙恬(몽념)의 지휘아래 요동에 장성을 축조한바 있다. 그러나 고조선을 크게 침공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진국이 토멸하였다는 조선은 국경지역에 있었던 지명일 수밖에 없게 된다.


역사는 상식입니다. 조선은 연에 망하지 않았습니다. 연에 망할정도였다면 연이 전국통일을 했을겁니다. 맨날 지네끼리 싸웠는데 몇만군사를 동쪽 변방으로 동원가능할까요.

다만 진개전쟁의 여파로 조선은 고대봉건제가 뿌리부터 흔들렸으며 이건 북부여기를 보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변방을 지키던 소위 기자국도 흔들렸으며 위만에게 정권을 뺏기고 발해만으로 도망간것이죠.  그 결과 조선은 기자국 진번 등 대읍을 뺏겼으며 요동으로 이동할수밖에 없었고 그런 무능력을 본 각지 실력자들이 들고 일언 열국시대로 돌입한 것이죠.

울티마툴레님의 댓글

더불어 연국의 유적에 대해 말씀하셨는데요
그거 별거아닙니다. 연국이 진시황에 망하면서 많은 유민들이 요서로 넘어왔고 또 장성노역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도주했습니다. 그들이 요서로 들어와 남긴 유적에 불과합니다. 더군다나 연왕 희가 연국의 요동ㅡ난하 서부연안ㅡ을 회수하여 농성하다 공파당했는데 토벌당하여 잔당들이 요서로 도주했지요. 그들이 남긴 유물도 적지않습니다. 그만큼 당시 요서는 무정부상태였습니다. 고대읍제봉건사회였던 조선이 무너져내리던 과정이었으니까요.

흥무대왕님의 댓글의 댓글

울티마툴레님, 오랫만입니다.

댓글을 달았다가 오해가 있을 듯 하여 지우고 다시 댓글 드립니다. 이런 얘기는 만나서 소주 한잔 마시며 해야 하는데 아쉽네요...

1. 제 주장을 오해하는 부분
  - 조선이 연에 망했다  : 조선은 연과 전쟁에 패해 영토를 일부 잃었을 뿐입니다.
  - 연과 고조선의 국경이 압록강이다 : 연과 후조선의 국경은 혼하 또는 천산산맥입니다.
  - "준왕조선"이라는 단어 : 저는 더이상 "준왕조선"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습니다. <고려사>를 따라 "후조선"이라고 부릅니다.

2. 문헌에 대한 생각
  - 대/소/대륙고조선론자 모두 문헌에 근거해서 주장을 폅니다. 문제는 자기 주장과 배치되는 문헌은 언급하지 않고 입을 닫는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세 진영 모두 동일하더군요.
  - 고대 문헌은 정보부족, 오해, 정치적 왜곡 등 여러 이유로 정보가 오염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 고고학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 고고학에 대한 생각
  - 고고학은 특정 유물 한두점으로 뭔가를 알아 낼 수 있는 학문이 아닙니다. 다수의 유물을 확보하여 분류하고, 분석하고, 계통을 찾아서 흐름을 밝히는 등 인문학보다는 과학의 영역에 가깝다고 보고 있습니다. 다만 모든 도구가 그렇듯 고고학도 한계와 단점은 있습니다.
  - 연의 유물이든 낙랑의 유물이든 고고학자들의 해석과 주장에 대해서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제 공부는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진실이 궁금했을 뿐, 제 주장이 어느 진영에 속하는지는 관심 없습니다. (제 가설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네요...)

제 글을 읽는 분들을 설득할 생각은 없습니다. 지난 2년간 여기저기 돌아다녀보니 차분하게 논의를 할 수 있는 역사 토론의 장은 어디에도 없더군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답정너의 태도를 보여주는데 질렸습니다. 그나마 논의 과정에서 작은 정보라도 얻을수 있으면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공부는 계속 할거고, 새로 알게되는 정보를 반영해서 가설은 계속 업데이트 하겠지만, 누군가를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일은 없을겁니다.

울티마툴레님도 답을 찾았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대로 가셔도 괜찮습니다.

울티마툴레님의 댓글의 댓글

님의 생각을 공개장소에 노출시키는 순간부터 논쟁의 대상이 될 수있는 것이죠. 그렇기에 어디진영에 속하냐마냐는 별로 중요한건 아닙니다.  자기주장만 하면 되는데 제대로된 사료비판위에 이뤄져야하겠죠. 
그리고 전조선 후조선 분류는 님선택사항입니다. 하지만 준왕조선같은 허구적 개념은 도입해선 안되죠.  그리고 연국의 침공피해에 대해 과도한 해석이 문제인거죠

흥무대왕님의 댓글의 댓글

논쟁은 좋은 데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겠죠.

사료비판에 대해서는 제가 별로 할 말이 없네요. 한자도 한문도 잘 모르는데다, 부정확한 사료 해석에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그닥 열심히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관련 논문들은 봤으니 중요한 사료에 대해 어느 정도 기본적인 내용은 알고 있다고 봅니다.

참... 북한에서 출간했다는 "낙랑국유적유물" 책은 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정보 공유 감사합니다.

로또님의 댓글

두분의 댓글을 살펴보면서 드는 생각은 ...

소위 고대사의 논란 부분은 대부분 고구려 영역내의 문제들입니다.
이런 논란이 생기는 이유는 고구려가 죽었기 때문이지요.
고구려가 죽으면서 자료가 다 날아가버렸고 신라는 그걸 수집할 의무가 없고,나중에 발해도 죽으면서 또다시 날려버렸죠.
고려시대에 잔존한 자료들을 겨우 모아놓은게 삼국유사 제왕운기 정도인데 이것들은 이미 날려버린 이후의 잔존물이기때문에 후세가 보기에 모순덩어리가 되는 것입니다.설사 그것이 진실이라고 할지라도 말이죠..
결국 조선시대에 사대주의 놈들이 이러한 모순덩어리 잔존물마저 다 버리고 오늘날 현대인들이 배우는 정체모를 역사가 되었죠.

계속 논란이 생기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논란 지역의 당사자들이 남긴 자료는 다 잃어버리고 그 지역과 관련이 없는 중원사료와 신라가 만들어낸 자료들로 그 지역을 이야기 하려니깐 현대인들에게 비판만 받게되죠.
참으로 답답한일입니다.

그래서 아예 흥무대왕님처럼 순수 고고학으로 접근하는것도 좋은 방법일수도...

흥무대왕님의 댓글의 댓글

오.. 로또님, 오랫만이네요.

사료 부족에 대한 지적은 심히 공감하고 있습니다. 또한 오해, 오류, 왜곡 등으로 얼룩진 사료 때문에 잘못된 역사 연구에 인생을 낭비하는 분이 너무 많네요(학계 포함).

암튼 저는 삼조선설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아직 풀어야 할 숙제가 크게 2가지 있습니다.

1. 후조선-연 전쟁 (bc 280년경) 이후 후조선이  이동한 압록강 또는 혼강 유역에서 후조선/위만조선의 도성(왕검성)과 유물의 발견

2. 진국-낙랑군의 지배 구조 파악

언제쯤 답을 찾을 수 있을지... ㅜ

로또님의 댓글의 댓글

진나라의 요동군 위치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 이상, 한국고대사는 영원히 논란속에서 허덕이게 될 것입니다.
한국고대사의 논란 해결의 핵심문제는 그 자체에 있는게 아니라, 옆동네 요동군의 위치에 달려있기때문입니다.
요동군의 위치가 바로잡히면 모든 논란은 끝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맨날 낙랑군 위치로 논란을 해결하려고 합니다.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요동군 위치부터 바로 잡고, 몇개 사료로 요동군이 어디에 있었다 라고 가볍게 할게 아니라,누구도 부정할수없는 그런 체계를 내놓아야 합니다.

윤내현교수는 진나라 시대 요동군의 위치를 갈석산 만리장성 동단 등 여러가지 지표를 제시하면서 그 것이 현 난하 일대에 위치하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렇게 체계적으로 접근이 필요합니다.무슨 몇리요 몇십리요 하는 것들도 요동군의 위치를 밝힐수 없습니다.또 후대의 사료로 당연히 밝힐수 없죠...반드시 그 시대의 지표물과 그 시대의 1차사료로 밝혀야 합니다.

요동군의 위치를 밝혀야 님께서 고민하시는 문제들을 포함하여 모든 한국 고대사의 의문이 풀리는 첫 발짜국이 될 것입니다.

로또님의 댓글의 댓글

본문 주제와 별로 맞지 않는 댓글을 달아서 송구합니다.
너무 답답해서 남겼으니 재미로만 봐주세요.ㅎㅎ

흥무대왕님의 댓글의 댓글

괜찮습니다.
저 혼자 떠드는 것보다 뭐라도 의견을 나누면 좋구말구요. 사람 사는게 그런거니까...
근데 울티님은 너무 심각해서 ... ㅜ

흥무대왕님의 댓글의 댓글

그리고 전 진의 요동군도 찾았다고 생각합니다.
제 글 "후조선-연진한 경계 검토" 을 참고하세요. 근데 진의 존속기간이 짧아서 물질문화로는 검증이 쉽지 않을 듯...

리지린/윤내현설은 물질문화를 설명하지 못해서 가능성이 낮다고 봅니다. 아쉽지만 2000~2020년 간에 눈부시게 성장한 고고학 성과를 반영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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