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월성 인신공양 흔적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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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2646118
작년 9월에 신라 월성에서 인신공양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기록(삼국사기)에 의하면 월성은 2세기 초에 쌓았는데, 왜 '제물 인골'의 발생 시기는 4세기인지 궁금했습니다. 여기저기 문의하다가 김상님께 아래와 같은 의견을 들었는데,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되어 정리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월성 이력
- AD 101 (파사이사금 22년) : 월성 최초 축성. 파사이사금이 경주에 정착함
- AD 298 (기림이사금 1년) : 월성 해체. 이 해에 신라가 멸망함. 즉, 임나가야(왜)가 신라를 병합한 후, 월성을 비롯한 모든 성곽을 허물고 군대를 해산함. 근거는 임나가야에 패전 후 유례이사금 사망, 다음 왕인 기림이사금부터 임나가야와 전쟁이 없음 등 삼국사기를 참고할 것.
- AD 344 (흘해이사금 35년) : 월성 재축성. 신라의 부활. 이 해에 신라가 임나가야의 청혼을 거절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당시 임나가야는 삼한백제의 담로국이었기에 이 사건은 흘해이사금이 임나가야-삼한백제에서 독립하겠다는 뜻임.
위 기사의 제물인골이 4세기로 추정되었다면, 인신공희는 4세기 월성 재축성 당시 벌어진 일이고 이때 새로 등장한 지배층(내물이사금계 김씨 왕통)이 북방유목민이라는 가설을 뒷받침합니다(북방유목민은 인신공양의 풍습 존재).
김상님은 이 지배층을 흉노-돌궐계 전연군으로 판단하고 계시지만, 부여에도 순장 풍습이 있었고 이 지배층이 부여 또는 고구려계라는 가설도 있기에 저는 이 집단의 출신에 대한 판단은 보류합니다.
좀 더 자세한 사항은 아래 김상TV 유튜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youtu.be/W-CKvRtC-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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