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선 안가르치는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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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라구
통일신라 말 9세기부터 고려시대까지 활동했던 한국계해적
당나라의 힘을 빌려 통일한 신라였지만
내부분열 . 민심악화 . 곤경으로 국경을 넘는일이 많았는데
100여년동안 , 약 20명의 왕이 바뀔정도로 소말리아급 혼란기였습니다
이시기 일본을 약탈한 한반도 남부출신 유민 , 도적의 약탈을 신라구라 칭하며
지방 호족들이 자기 세력 유지를 위해서 , 뒤에서 이들을 조종했고
군대에 준한 병력과 체계를 갖춘 준군사조직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신라구 활동기록
(1) 869년 5월 22일의 밤, 신라의 해적이 큰 배 두 척을 타고 하카타에 와서 견면(絹綿)을 훔쳐 도망쳤는데,
곧바로 군사를 일으켜 뒤쫓았지만 실패했다.
이에 신라 상인 윤청(潤清) 등 30명을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다자이후(太宰府) 관내에 체류하는 신라인들을 모조리 무츠 등지의 내륙으로 이주시켜
구분전을 주어 귀화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신라는 큰 배를 만들고 나팔을 불며 군사 연습에 힘쓰고 있었는데,
그에 대해 묻자 "장차 쓰시마를 정벌하여 차지하기 위함“이라고 대답했다.
왜 조정은 규슈에 병사 배치를 강화하고, 진구 황후(神功皇后)의 무덤에 제문을 올려
"일본은 신국이라 적국의 배는 오기도 전에 가라앉으리라"라는
신국사상(神國思想)을 널리 퍼뜨렸다.
(2) 893년 5월 11일, 다자이후에 또다시 신라의 해적이 나타났다.
신라의 도적들은 히고국(肥後国) 아키타군(飽田郡)에 들어와 사람을 죽이고 집을 불태웠다.
그리고 히젠 국(肥前国) 마쓰우라군(松浦郡)에서 멀리 도망쳐 버렸다.
이듬해인 894년 4월, 일본 조정은 신라의 해적들이 쓰시마 섬을 덮쳤다는 보고를 받는다.
다급히 연안 구니(國)에 경고를 보냈지만, 도적은 이미 도망가 버렸다.
(3) 895년 9월 5일 아침, 쓰시마의 훈야노 요시토모(文屋善友)는
군사들을 격려해 신라 해적들의 배 45척를 쇠뇌로 무장한 수백의 군세로 맞아 싸웠다.
요시토모는 적을 유인한 뒤, 수많은 쇠뇌를 한꺼번에 쏘게 했다.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는' 싸움 속에서 도망치는 도적들을 추격해
대장 3명과 부장 11명을 포함한 도적 302명을 사살하고,
배 11척과 투구 및 갑옷, 자루를 은으로 만든 칼 및 태도(太刀) 50자루, 활 110장,
창 1천 자루, 야나구이(弓胡) 110장, 방패 312개에 달하는
막대한 병기를 빼앗고, 도적 한 명을 생포했다.
현춘(玄春)이라는 이름의 그 신라인 포로는,
신라에 큰 흉년이 들어 창고는 텅 비고 백성도 굶주리고 있으며,
왕은 곡식과 견면을 가져오라며 배 100척과 2,500명의 군사를 각지에 파견했다고 증언했다.
3.. 왜 정부 반응
막대한 해적 피해를 입은 지역에서는 , 특히 신라에 대한 반감이 거셌으며
이 시기 문헌에도 신라에 대한 적대적인 표현이 종종 등장하고 있습니다
죠와 원년(834년)에는 현지에 체류하던 신라인들에게 활을 쏘아 다치게 하는 사람까지 나왔다
장보고 사후 신라의 내습에 대응하기 위해 신라인 입국을 금지하고 있다.
바로 후지와라노 마모루(藤原衛)의 4개조로 된 起請文이 그것인데
그것에 의하면 지금까지 신라인들을 ‘귀화인’으로 받아들 였지만, 이제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만 교역을 위해 온 상인들 은 교역을 마치면 곧바로 귀국시켰다
왜 정부는 군사적으로도 대비했는데 대마도를 비롯한 해안가에
석궁병을 다수 배치 시켜서 , 신라구에 대응했습니다
4. 신라구 없어진 이유
국가 권력이 미치지 않는곳에서 무역선 . 해적선의 구분은 쉽지 않은데
예전에는 무역선이 해적선으로 변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신라구는 해적 + 무역을 같이한거죠
후에 왜구가 동아시아 무역을 장악했을때도 , 한국인들은 왜구로 위장해 해적질을 했습니다
신라구는 일단 표면적으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로 사회가 안정되고
중앙정부의 통제력도 어느 정도 강화되면서 대체로 사라집니다
또한 이를 계기로 신라말기 이후로 악하됐던 , 고려 . 일본 양국 관계도 다시 회복됩니다

왜는 멀리 하늘 동쪽에 있고, 사면이 큰 바다이므로, 다른 나라의 군사가 침입하지 못한다.
다만 그들의 《연대기(年代記)》를 보면,
‘이른바 응신(應神 응신천황을 일컬음) 22년에 신라(新羅)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왔다.’ 하였는데,
명석포는 대판(大坂)에서 겨우 1백 리 떨어져 있다.
적간관(赤間關) 동편에 큰 무덤 하나가 있는데, 왜인이 이를 가리켜 말하기를,
‘이는 백마분(白馬墳)인데, 신라 군사가 깊이 들어오니, 왜 사람이 화호(和好)를 청하여 군사를 해산하고,
흰 말을 베어서 맹세하고, 여기에 말을 묻었다.’ 한다.
김세렴(金世濂) / 《해사록(海槎錄)》/문견잡록(聞見雜錄)
일본 응신천황 22년(서기 291년), 신라 군사가 아카시노우라(明石浦)에 들어가니
대판(大阪:오사카)과의 거리가 백 리였으므로 일본이 화친하고 군사를 풀어 달라고
액러하여 백마를 잡아서 맹세하였다.
호원이 크게 군대를 일으켰으나 겨우 일기도(一岐島:이키시마)에 이르러
마침내 크게 패하였으니 역대로 깊이 쳐들어가 왜인에게 이긴 나라는 오직 신라뿐이었다.
昔百濟臨政太子。乘舟入日本。都周防州。號大內殿。傳四十七世而絶。其從者之裔。代襲其土。都安藝州。卽秀吉驍將輝元之祖也。余竊以臨政爲王子豐。豊甞質於日本。百濟亡。百濟宗室。迎立爲王。豐乞師於日本以拒唐。及敗不知所之。是必與倭俱東也。方蘓烈以十三萬兵。杖鉞而來合新羅。共滅百濟。而豊以覆巢餘卵。嬰孤城而號咷。其亡不日。誰肯與之同其禍乎。然而白江之敗。血戰四合。海水盡赤。倭船焚者。四百餘艘。其不焚而逃者。不知幾艘。其致兵何其多也。其得死心。又何以至此也。百濟六百五十年之間。倭寇史無一見。至其亡救不得。則以王子歸。分土存祀。此不可謂只以利結也。新羅昔于老。儐倭使言曰。早晩以汝王爲塩奴。王妃爲爨婢。此戱耳。而侮之則深也。于老以是爲倭所焚。而于老之妻。又焚殺倭使以復讎。羅人之易倭可知。日本神應之二十二年。新羅兵入明石浦。浦距大阪纔百里。日本人乞和解兵。刑白馬以盟。今赤間關之東。有白馬墳云。日本環以重溟。外兵莫加。胡元大擧。廑至日歧島而卒大敗。歷代能深入取勝者。惟新羅而已。
- 신라가 정규군을 보내서 오사카 근방까지 침공 -
원정 천황(元正天皇) 4년(서기 720년, 성덕왕 14년) 4년
경신에 신라가 서쪽 변방을 와서 쳤다. (四年庚申。新羅來伐西鄙。)
해동제국기
- 통일신라의 일본 본토 공격 -
811년 12월에 신라인 약 110명이 5척의 배로 고지카시마(小近島)에 침공해와 약 9명을 죽이고 100명을 사로잡았다.
新羅の一百十人、五艘の船に駕り小近島に着き、土民と相戦う。即ち九人を打ち殺し、一百人を捕獲す。
- 신라구의 일본 약탈, 이 사건을 시작으로 신라구의 세력이 점점 커져서 일본 서부 지방이 신라구에 의해 초토화됨 -
이 때 고려인들은 큐슈에 와서 민가를 태우고 재산을 수탈하고 남녀 300명을 납치해갔다. -(백련초 토쿠3년(997년) 10월 1일조)-
규슈 지역에서 고려국인이 그 지역의 일본인을 살해하였다.
피해규모가 치쿠젠, 치쿠고, 사츠마, 이키, 쓰시마에 이르며 수백명의 사람들이 납치 당하고 죽었다. -(백련초 토쿠7년(1001년)의 기록)-
- 1차 여요전쟁 후 고려가 일본에 '통상' 할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 당하자 함대를 보내 규슈 지방을 공격 -
덤으로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왜에서 생각하는 신라인들의 이미지인것 같음
서쪽에 살고 있는 비열하고 천박한 신라인들,
하늘을 거역하고 우리가 베푼 은혜를 저버리고 우리 관가를 부수고
우리 백성을 독살하고 우리 군현의 사람들을 씨를 말려 죽이고…
살아있는 사람들을 소름이 끼치게 간을 꺼내고 웃으면서
다리를 잘라내고 시체를 태운다.(『日本書紀』「欽明天皇」)
----킨메이(欽明) 천황(509~571)이 내린 조서의 일부에 있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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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보면 왜의 본토로 신라와 고려의 군사들이 쳐들어갔고
그로인해 많은 인적 재물적으로 피해를 봤다고 나옴
그러나 역사에서 알려진 동남아와 중국 그리고 우리나라의 해안가에서
각종 약탈과 인질로 끌려갔던 양민이 더 많았으며
여러나라의 시서에서도 왜구의 노략질이 더 심했음을 알려준다.
아마도 삼국통일 후의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과 약탈에서 도망친 사람들에의해
만들어진 해적이 아니였을까 싶다.
가까운 나라인데 침략을 서로 하고 당하고 헸을텐데
그저 일방적으로 당하기만했다는 이야기보단 좀 더 신빙성이있는 글이다.
이미 도래인이라해서 왜의 주류이자 왕또한 한반도 도래인이라 밝혔듯이
수시로 넘어가고 침략도 했었겠지 하는 생각에 어느정도 현실화한 글이 아닐까 한다.
이 글에서도 한번도 침입자를 허하지 않았다는
왜구들의 이야기가 허상임이 밝혀졌다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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