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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발제글 보론 2 : 괴베클리테페는 간빙기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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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öbekli Tepe


터키어로 '배불뚝이 언덕'이란 뜻으로,터키 남동쪽샨르우르파(Şanlıurfa)도 외렌직(Örencik)군에 있는 유적.


2018년 6월바레인마나마에서 열린 유네스코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터키의 18번째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등재되었다.


이 유적은 해발 760미터에 위치한 언덕 정상에 묻혀 있었는데 현지인이 우연히 찾아서 몰래 파내려다가 발견되었다. 이후 1963년에 미국시카고 대학과 터키이스탄불 대학이 공동조사를 하여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독일인고고학자 클라우스 슈미트(Klaus Schmidt)를 단장으로 한 조사단이 1994년부터 2014년까지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하였다. T자 형태 돌기둥 2백 개 이상이 늘어서 스무 겹으로 원을 이루는 형태가 특징인데, 기둥 중 가장 높은 것은 5.5 m에 달한다.



2010년 발표된 결과로는 가장 오래된 부분이기원전 9600년 무렵, 즉 토기 없는신석기 시대(PPNA)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이 정도 크기의 인공 구조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대표적인 대규모 고(古)유적이자세계 7대 불가사의이기도 한이집트대피라미드가 대략 기원전 2000-2700년 무렵 건설된 유적인데 괴베클리 테페는 이 시기를 아득히 뛰어 넘는다. 단순 계산으로 따져도 피라미드가 지어진 시기와 현대까지의 기간(4000년)보다, 괴베클리 테페가 지어지고 피라미드가 지어지기까지의 기간(7000년)이 3000년이나 더 길다. 심지어 최초의 문명도시라고 하는수메르 문명보다도 앞선 것이다.

슈미트 교수에 따르면 기둥에 새겨진 부조나 주변에 나타난 흔적 등을 토대로 보건대수렵채집인들이 건축한 듯하지만, 일 년 중 일정기간은 마을에서 거주했던 듯하다.

유적이 위치한아나톨리아 지역은 현재까지 발견된 도시 중 가장 오래되고 초기 밀농사를 했다고 추정되는 유적들도 발견되므로, 수렵인들이 이런 종교시설을 건축하며 모여 살다가 농사를 지으며 정착민으로 변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새로운 학설이 제시되었다.


그런데 2019년, 괴베클리 테페에서 38km 떨어진 카라한 테페(Karahantepe)에서 T자형 기둥이 250개나 발견되어 괴베클리 테페보다 더 거대한 신전이 있음이 드러났고 괴베클리 테페와 카라한 테페 이외에도 주변지역 각지에서 T자형 기둥 신전이 잇따라 발견되어 상상이상으로 거대한 집단으로 드러났다. 신전 주변에서도 곡식을 빻기 위해 필요한 맷돌과 탄화된 곡물 또한 대량으로 발굴되어 구석기 시대라 여기던 시절에 초기농업사회가 탄생했다는게 드러났다.


괴베클리 테페는 언덕 위에스톤헨지처럼 원 모양으로 세운 돌기둥이 특징인데, 기둥들에는 여러 가지곤충동물 형상이 양각되어 있다. 돌기둥들은 T자 형상을 하였는데 사람을 나타낸 듯하다. T자형 돌기둥의 몸통 부분(ㅣ부분)에는 손과 인체형상이 조각되었지만 얼굴 부분(ㅡ부분)에는 아무 조각도 없다. T자형 유물은 한국의솟대나 일본의토리이에서도 볼 수 있는데,가 하늘과 인간을 연결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새가 앉는횃대를 형상화한 것이다. 다른 유적에는 사람 얼굴을 새겼으므로, 여기서는 얼굴을 조각할 수 있지만 하지 않았다고 추정한다.

이곳이 일상생활을 위한 장소가 아님이 유력하다. 굳이 중간에 T자형 돌기둥을 세워 몸통 부분에 손 모양을 조각한 점을 보건대 신앙을 위해 신을 형상화했지만 얼굴은 조각하지 않았다고 추정한다. 유적지 주변에서는 농사를 짓거나 사람이 거주했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학자들은 수렵채집에 의존했을 건립집단이 이곳에서 연중 어느 정도는 머무르며 종교적 행사를 치렀으리라 본다. 이는 주변에서 잡아서 이곳으로 가져와 먹고 묻은 야생동물들의 뼈가 대량으로 발견된 점에서 유추하였다.

돌기둥을 세우고자 인근에 위치한 석회암 언덕에서 바위를 떼어내 운반했는데, 기둥 하나의 무게가 10-20톤에 달하기 때문에 운반과 조각, 건설에 적어도 5백 명 이상 대규모 인력이 필요했으리라 보인다. 이 시기는 겨우 원시적인농업이 시작되려던신석기 시대 초기로 추정한다.고고학계의 기존학설에 따르면, 인류가 이러한 거대유적을 조성하려면 체계적으로 토목활동이 가능한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하고, 이를 뒷받침하려면농경생활에 따른 체계화된 사회조직이 등장해야 한다. 그런데 괴베클리 테페에서 문자바퀴,토기,청동기의 사용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점, 그리고농업이나가축 사용을 짐작하게 할 만한 유물도 발견되지 않은 점이 기존 신석기 혁명과 농업발전을 통한 인류의 집단사회 구조형성과 충돌한다.

사실 집단사회 형성이 농경보다 앞설 수 있음은 학계에서는 이미 1990년대부터 논의되어 충분히 받아들여진 내용이므로 그 자체가 그렇게까지 충격적인 것은 아니다.하지만 이는 학계 수준에서 "그럴 수도 있겠다" 정도로 논의 된 것이었지, 이를 뒷받침할 만한 특별한 근거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설은 수렵채집 → 농경생활(집단 사회 형성) → 국가/종교의 출현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것이 전세계 역사 교과서에 실리며 보급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농경 이전의 집단사회가 이러한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일 수 있을 정도로 체계적이고 대규모일 수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놀랍다.


괴베클리 테페를 해석하는 데 가장 관건이 되는 것은,농경사회가 등장하기 전인 토기없는 신석기 시대에 어떻게 조직 노동력과 문화가 등장했느냐는 점이다.

아직까지 괴베클리 테페에서는 농경지나 거주지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인근에 위치한 후대 유적인 네발르 초리(Nevalı Çori)에서 괴베클리 테페와 비슷한 양식의 돌기둥과 조각들이 발견되고 또한 괴베클리 테페와는 달리 집터들과 원시적인농사 흔적이 밝혀졌다. 네발르 초리(Nevalı Çori)는 1983년부터 1991년까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초기 신석기 거주지 유적으로 농업의 흔적과 매장의 흔적도 발견된 곳이다. 약 기원전 8400년에 세워져 8100년에 몰락했다고 추정한다.

두 유적이 위치한 지역은 현대 밀 재배종의 원산지인데, 네발르 초리에서 발견된 밀 농사 흔적은 아마도 인류최초의 밀 재배였던 듯하다. 슈미트는 야생 곡물을 채집하여 식량원으로 삼던 이곳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집단적으로 곡식을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추정했다. 집단사회체계를 농경 정주생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기존 학설과 정반대로 수렵 채집민들에게서도 집단 체계가 나타날 수 있고, 농업 또한 이들이 조직적으로 할 수 있다는 이야기라, 기존의 상식과는 반대된다. 이 때문에 슈미트 교수는 이 유적이샤머니즘적인수메르 신화의 조상 격에 해당하는 원시신앙을 믿던 사람들이 만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즉, 사냥 및 채집을 하는 수렵생활 → 원시적인 농업활동으로 먹을거리를 충분히 확보 → 사람들이 신을 섬기는 유적을 만드는 여력이 되는 것이 인류 역사의 흐름이라고 생각하였는데,이 당시 농업을 했다는 증거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기에먼저 종교가 있었고, 종교적 제단을 만들기 위해 사람이 모일 수밖에 없었으며, 그 인력을 먹여살리기 위해 농업이 발달했다는 충격적인 가설이 나온 것이다.

사실 그동안에도 기존 이론을 두고 문제를 제기한 이들이 있었다. 단순히 놓고 봤을 때 원시적인 농업은 결코 수렵채취보다 식량을 많이 얻기 힘들었고, 영양학적으로도 수렵채취 쪽이 더 나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어떠한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다수 모였다면, 일정지역 내에 제한적인 식량만이 생산되는 수렵채취보다 인위적으로 식량 생산을 증가시킬 수 있는 농업이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즉 위의 가설이 맞는다면 인류가 농업으로 전향한 미스테리가 어느 정도 풀린다. 확실한 내용은 발굴이 더 진척돼야 알 수 있겠지만기존 학설을 뒤엎을 수 있는 괴베클리 테페의 고고학적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즉, 인류가 체질에 맞지도 않는 정착생활을 시작한 것은, 일군 논밭을 지키려는 속지적 사고방식이 아니라, 자기 무리들 간의 정서적 유대를 가능케 해주고, 대자연의 가혹한 생존환경에서 무한한 정신적 안식을 제공해주는 소중한 종교 건축물들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해석으로 이어진다.









갠적인 견해.  


영거드라이아스기가 북반구전체에서 진행되었지만 모든 지역에서 진행된 것은 아닙니다. 주로 북미유럽지역과 시베리아와 인접한 동아시아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즉 전반적인 온도하강이 있었지만 일부지역에서는 간빙기가 지속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따라서 괴베클리테페는 간빙기가 지속되었던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이 채집ㅡ수렵ㅡ농사 등 다양한 생산활동을 전개하면서 일정한 사회단계인 추방(추장)사회에 돌입하였슴을 보여주는 유적이라고 볼 수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 이상으로 나아갈 생산력의 확보까지는 못미쳤다고 봐야 합니다.  기술과 지식의 태부족 및 도구개발능력 부족으로 초기추방사회에 머물다고 오랜 시간이 흐른뒤 드디어 수메르문명과 같은 도시국가ㅡ고대국가 단계로 발전했다고 해석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요약하면 지역별로 영거 드라이아스기 전개 양상이 달랐기에 간빙기가 계속 유지된 일부지역에 인구가 밀집했고 생산력이 어느정도 뒷받침되어 유적을 만들 수있었으나 생산력의 한계로 인해 자연스레 퇴화되었다가 생산력이 뒷받침되자 인류는 비로소 수메르같은 고대문명을 이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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