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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군현 위치 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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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군현 위치를 각 현과 근거까지 작성하려니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일단 대체적인 시공간만 정리하고, 상세한 내용은 다시 올리겠습니다.


군현의 위치가 시간에 따라 달라지니 그 점 주의 하시기 바랍니다.






* 참고문헌

- 왜곡된 역사, 조승완, 어드북스, 2008


관련자료

댓글 25

울티마툴레님의 댓글

질문이 있습니다.
1. 첫번째지도에서 요동과 요서를 나누는 기준으무엇입니까? 이게 분명해야 위치비정이 잘 될 거같습니다. 윤내현교수의 의견은 "고대중국인들은 동북쪽 경계를 이루는 강을 요하라고 부른다"라고 하며더 1번시기에 요하는 난하였다고 논증하더군요.

흥무대왕님의 댓글의 댓글

조승완님도 고대 중국인은 요동을 극동의 의미로 썼다고 생각하십니다. 따라서 중국의 동변이 확대 됨에 따라 요동의 위치가 변한다고 봤습니다.

1번 지도는 기원후 2년의 요동군과 요서군을 비정 한겁니다.
각각 현의 위치까지 보여 드릴겁니다.

울티마툴레님의 댓글의 댓글

아! 그럼 기원전108년경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지도가 더 필요하겠네요.기원전2년이면 한군현설치시가 아니니까요.
한군현중 임둔 진번은 설치후 몇년안가서 폐지되여고 낙랑과 현토만 살아남았으니 첫번째 지도앞에 새지도를 만들어 기워턴108년경 상황을 표시하고 기존 첫번째지도에선 임둔과 진번을 빼면되겠네요.

흥무대왕님의 댓글의 댓글

그런식으로 접근하는 게 옳아 보입니다. 그런데 기록이 부실해서 원...

암튼 저 그림은 <한서 지리지>를 참고한겁니다

울티마툴레님의 댓글의 댓글

그리고 어느 글을 보니까 사기에 한군현의 위치는 전혀 안나오고 위만조선의 한나라헙력자들이 한군현과 상관없는 지역에 봉해졌기에 한군현중 낙랑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도상계획에 불과했다는 내용을 봤는데요. 찾아보니 사실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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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무대왕님의 댓글의 댓글

사실 위만-한 전쟁은 좀 이상합니다. 승리한 한나라 장성은 모조리 처형당하고, 패배한 위만조선 명망가들이 제후로 임명됩니다.

하지만 4개의 군현이 설치된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2개는 금방 폐쇄 됐지만...

Marauder님의 댓글의 댓글

예전에 들었던 바로는 요동이 먼저 등장하고 요동이 요서가되고 요동군은 지금의 요동으로 옮겨졌다는글을 본적이 있네요.

울티마툴레님의 댓글

2. 마지막지도에서 만리장성 동단이 저기라면 사서에 나오는 창려현과 갈석산도 거기에 있어야하며 실물도 거기에 있어야합니다. 근거가 있나요?
윤내현교수의 한국고대사신론 부록에 보면 1978년경 중국학자들이 지금의 진황도시에 있는 갈석산이 고대부터 내려오는 갈석산이라고 논증을 했는데요. 시황제의 아들이 황제가 되자 주요신하들이 요동에 있는 갈석산에 다녀오면서 비석을 세웠는데 그 비석이 아직도 거기에 있다네요.

흥무대왕님의 댓글의 댓글

제가 알기론 만리장성도 변화가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진나라 장성을 대상으로 분석하고 있으며, 낙랑군 수성현의 위치를 비정하는데 이용합니다.

이 책에서는 창려현과 갈석산은 다루지 않으니 추후 논의하는 게 좋겠습니다.

흥무대왕님의 댓글의 댓글

참고로... 저도 갈석산이 진황도시에 있다고 생각하고, 만리장성 동단은 산해관이라고 봅니다. 시대에 따라 만리장성이 증축, 폐쇄 된거 같아요. 공부를더 해 봐야죠.

울티마툴레님의 댓글

참고자료입니다. 윤내현교수의 요수위치 논증입니다

춘추시대로부터 서한시대에 이르는 시기의 요수의 위치를 확인할수 있는 보다 더 분명한 기록이 “說苑(설원)”에 보인다. “ 설원” “辨物(변물)”편에는 춘추시대에 齊國(제국)의 桓公(환공)이 貫中(관중)과 함께 孤竹國(고죽국)을 침공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그 기록을 보면 그들은 고죽국에 이르기 전에 卑耳(비이)라는 계곡을 10리쯤 못가서 강을 건넜는데 그 강의 명칭이 요수인 것으로 되어있다. 이기록은 “管子(관자)” “小問(소문)”편에 있는 것을 옮겨 적은 것인데 “관자”의 기록에는 강을 건넌 것으로만 되어 있고 강명은 적혀있지 않았다.

 

그런데 “설원”에는 요수라는 강명이 삽입되어 있다. 따라서 설원의 저자인 류향이 강명을 확인하여 보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죽국의 위치는 대체로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 노령현 지역이었을 것이라는데 이론이 없으며 노령현은 난하의 하류연안에 위치하고 있다

 

西周(서주)시대로부터 戰國時代(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齊國(제국)은 지금의 산동성에 있었고 당시에 제국의 환공과 관중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북부에 있었던 山戎(산융)을 토벌한후 동쪽을 향하여 고죽국 침공에 나섰으므로 그 지리적 관계로 보아 침공시 건넌 요수는 지금의 난하였음을 알수잇다. “관자”는 전국시대의 저술이지만 제국의 환공은 춘추시대 초기인 기원전 7세기의 인물이며 “설원”은 서한의 류향에 의하여 저술되었으므로 춘추시대 또는 전국시대로부터 서한시대 초기에 이르기까지는 지금의 난하가 요수로 불리어 졌음을 알수있다.

 

지금의 난하가 요수였음은 “水經注(수경주)”에서도 확인된다. 지금의 난하는 濡水(유수)라고도 불리어졌는데, “수경주” “유수”조를 보면 앞에 소개된 “관자” “소문”편의 환공이 고죽국을 정벌한 내용이 실려있다. 그리고 비여현 근처의 산 위에 있는 사당에 얽힌 전설도 소개하고 있는데 전설에 등장한 그 지역의 강명이 요수로 불어졌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비여현은 고죽국 지역으로써 지금의 난하 하류 유역에 있었다. 이로써 “수경주”의 편찬자인 *도원도 지금의 난하를 요수로 인정했음을 알게 된다

울티마툴레님의 댓글

이어서.

그런데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은 지금의 요하를 고조선. 위만조선시대의 요수로 인정하고 그 동족지역을 요동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므로 요수라는 강명이 어느 시기에 지금의 요하로 이동해 왔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漢書(한서)”“지리지” 현토조를 보면 “한서”의 편찬자인 班固(반고) 자신의 주석으로 요수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강은 중국의 문헌에 등장한 요수 가운데 가장 동쪽에 위치한 것으로 그 위치나 흐름 방향으로 보아 지금의 요하이다. 다시말하면 한서 지리지에 보이는 요수는 지금의 난하가 아니라 지금의 요하인 것이다. 따라서 이 기록에 따라 서한시대와 그 이전의 요수는 지그므이 요하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것은 “漢書(한서)”는 東漢(동한)시대에 편찬 되었으므로 서한 말까지의 역사와 지리가 수록되어 있는데 서한 초로부터 말기 사이에는 서한의 동북지역의 영역에 크게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즉 서한 무제가 원봉3년(기원전 108)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하여 서한의 영토가 지금의 요하에 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 보아 요수는 고대 중국인들이 그들의 동북부 국경을 이루는 강에 대해서 부르던 명칭 이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요하가 원래 요수가 아니었음은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삼국유사 “順道肇麗(순도조려)”에는 “요수는 일명 鴨淥(압록)이었는데 지금은 安民江(안민강) 이라고 부른다”고 부른다“고 하였다. 이로써 서한 무제 이후에 중국인들이 지금의 요하를 요수라고 부른 이후에도 고구려인들은 그것을 압록수라고 불렀으며 고려시대에도 안민강 이라고 했음을 알게 된다. 고대 중국인들은 동북부 국경을 이루는 강을 遼水(요수)라고 하였고, 고대 한국인들은 그것을 鴨淥水(압록수)라고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고찰로서 분명해진 것은 고조선. 위만조선시대의 요수는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난하였고, 지금의 요하가 아니었으며 당시의 요동은 지금의 난하의 동북쪽 지역을 지칭 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요동은 고조선.위만조선의 영토였으므로 남하의 동쪽지역이 고조선의 영토였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요수라는 명칭이 지금의 난하로부터 요하로 옮겨온 후에도 난하의 동북부유역을 여전히 요동이라고 불렀던 것이니 “삼국지” “魏書(위서)” “烏丸鮮卑東夷傳(오환선비동이전) 고구려전”에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1천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하였는데 중국의 삼국시대에 고구려는 서쪽 국경을 지금의 요하와 접하고 있었으므로 당시의 요동은 지금의 난하 동북부 유역이었음을 알수 있다.

 

그런데 管子(관자)를 보면 춘추 전국시대에 연국에도 요동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있다. “管子(관자)” “地數(지수)”편에는 管仲(관중)이 제국의 환공에게 말한 내용 가운데

楚國(초국)에는 汝漢(여한)의 金(금)이 있고 齊國(제국)에는 渠展(거전)의 鹽(염)이 있으며 燕國(연국)에는 遼東(요동)의 煮(자)가 있다

 

고 한 것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연국에는 煮(자)의 생산지인 요동이 있었음을 알 수있다

煮(자)는 짠물을 끓여서 만든 소금을 말하므로 연국의 요동은 해변지역 이었을 것이다. 제국의 환공과 관중은 춘추 초기(기원전 7세기초)의 인물이었으므로 연국의 요동은 춘추초기부터 있었다고 볼수 있다. 지금까지 고찰한 바를 종합해 보면 요동은 고조선에 속한 부분이 있었고 연국에 속한 부분이 있었는데 연국에 속한 부분은 바다에 접해 있었다는 것이 된다

 

요동은 요수의 동북지역에 대한 명칭이었음은 앞에서 확인된바 있다. 따라서 연국. 句은주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요수의 동북부 지역에까지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고조선의 요동을 명확하게 인식하기 위하여는 연국의 요동이 요동의 어느 부분이었는지를 밝힐 필요가 있다. “鹽鐵論(염철론)” “險固(험고)”편에는 연국의 국경에 대해서

 

大夫(대부)가 말하기를 ,,,,,, “연국은 碣石(갈석)에 의하여 막히었고 邪谷(사곡)에 의하여 끊겼으며 요수에 의하여 둘러싸였다.,,,,, 이것들은 나라를 굳게 지킬수 있게 하니 산천은 나라의 보배이다”라고 하였다

 

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에서 갈석과 사곡이 요수와 더불어 연국의 국경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언급된 갈석은 秦(진).韓(한)시대에도 같은 명칭으로 불리어 졌던 곳으로 앞에서 언급된바 있는 갈석산이 있는 곳인데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난하 하류의 동부연안에 있는 창려 갈석이었다는 것은 주지되어 있다. 그런데 당시의 요수는 지금의 난하였으므로 연국 요동의 남부지역은 지금의 난하 하류 동부연안의 발해와 접한 하북성내의 일부로서 창려.갈석까지 였음을 알 수 있다

울티마툴레님의 댓글

이어서.
그러면 연국 요동의 북부 경계는 어디였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기록들에서 확인된다. “呂氏春秋(여씨춘추)”에는 전국시대 각국의 요새 가운데서 대표적인 것으로 大汾(대분). 冥*.荊阮(형완), 方城(방성), *, 井경. 令차, 句注(구주), 巨庸(거용) 등을 들고있다. 이 가운데 영차와 거용은 연국의 국경에 있던 요새인데 동한의 고유는 영차에 대해서 주석하기를 “영차는 요서에 있는데 이곳은 바로 令支(영지)이다” 라고 하였다. 巨庸(거용)은 지금의 북경 북방에 그 유적이 남아있다. 그런데 한서 지리지 요서군조에 의하면 영지에는 고죽성이 있었으니 영지가 고죽국지역 이었음을 알수 있다. 고죽국의 중심지가 난하 하류의 동부연안으로 지금의 노룡현 지역이었다고 하는 것은 주지된 사실이다. 杜佑(두우)는 通典(통전)에서 고죽성이 唐시대의 노룡현에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난하가 濡水(유수)로도 불리어진 바 있음은 앞에서 말하였는데 “수경주” 유수조를 보면 “유수는 동남으로 흘러 노룡의 옛성의 동쪽을 지난다”고 하였고, 또 “동남으로 흘러 영지현 옛성의 동쪽을 지난다”고 기록 되어 있으니, 영지는 유수의 서쪽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영지는 전국시대에는 영차였고 유수는 난하의 옛 명칭 이었으므로 연국의 국경 요새였던 영차는 지금의 난하 서부연안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영차의 이북지역은 난하의 상류와 중류에 의해서 고조선과 연국 사이의 국경이 형성되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난하 중하류의 서부연안에 위치했던 영차요새로부터 난하의 하류 동부연안에 위치한 창려 갈석에 이르는 선을 경계로하여 난하와 그 사이가 연국의 요동이었음을 알수 있다. 따라서 요동의 대부분은 고조선에 속해 있었고 그 서남부 귀퉁이 일부가 연국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제기 될수 있다. 그것은 고죽국의 중심지가 난하 하류의 동부연안이었다면 어찌해서 영지의 고죽성은 난하의 서부연안에 위치했었나 하는 점이다. 이점은 다음과 같이 이해된다. 영지의 고죽성은 방어용의 것으로써 원래 고죽국이 난하의 서부연안까지 진출해 있었으나 후에 연국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그 지역이 연국에 속하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울티마툴레님의 댓글

이어서

또 한가지 해명을 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요녕성에서 출토된 연국의 청동기에 관한 것이다. 지금의 중국 요녕성 능원현 마창구에서는 “匽侯(언후)” 라는 명문이 있는 연국의 청동기가 출토된 바 있다. 이 청동기의 출토지점은 연국의 요동지역을 조금 벗어난 고조선의 요동에 속하는 곳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 청동기의 출토에 근거하여 그 지역이 연국에 속했을 것으로 보고 있으나, 그것은 당시에 고조선 지역으로 망명했던 연인이 있었음을 알게하여 주는 것이다. “史記(사기)” “燕召公世家(연소공세가)”에 의하면 전국시대말에 연국이 진국에 의하여 멸망될때 燕王(연왕) 喜(희)가 요동으로 도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같은 사건을 전하는 “仕記(사기)” “秦始皇(진시황)本紀(본기)”의 기록에는 단순히 연왕 희가 요동으로 도망하여다고 전하지 않고 연왕 희가 동쪽의 요동을 회수하여 그곳의 왕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 기록은 연왕 희가 도망했던곳이 연국의 요동임을 분명하게 해준다. 만약 연왕 희가 고조선의 요동으로 도망했었다면 그곳을 회수하였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가 없을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원전 222년(연왕 희 33)에 진국이 요동을 치고 연왕 희를 붙잡았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연왕 희의 일행 가운데 일부가 고조선 지역으로 망명을 하였고 앞의 “언후” 청동기는 그들이 남긴 유물일 것으로 생각된다. “史記(사기)” “조선열전”과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에 주석으로 실린 “魏略(위략)”에 의하면 위만은 옛 燕(연). 齊(제) 망명자들을 규합, 箕子國(기자국)의 準王(준왕)으로부터 정권을 탈취했는데 이러한 연,제의 망명자들은 이미 전국시대에도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울티마툴레님의 댓글

이어서

이상으로서 전국시대의 연국 요동은 확인되었는데 진시대로부터 서한초에 이르기까지 중국에 속해 있었던 요동은 어느 지역이었는가? 이 시기에 중국에 속해 있었던 요동도 전국시대와 다름이 없었다. 진에 속해 있었던 요동의 위치는 “사기 진시황본기”에서 확인된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록이 있다. 진제국의 2세황제가 동부의 군.현을 순행 하였는데 그때 이사. 거질. 덕 등의 대신들이 수행을 하게 되었다. 갈석산에 이르러 진시황제가 세웠던 비석의 한 귀퉁이에 2세황제를 수행했던 대신들이 그들의 이름을 기념으로 새겨넣고 돌아왔다. 이에 대해서 2세황제는 대신들의 이름만 새겨넣고 始皇帝(시황제)의 공덕을 새겨넣지 않은 것을 꾸짖었다. 그러자 대신들이 잘못을 빌고 다시 갈석산에 가서 시황제의 공덕비를 세우고 돌아 왔는데, 이에 대해서 “史記(사기)”의 저자인 사마천은 대신들이 요동에 다녀왔다고 적고있다. 이것은 진시대의 요동이 갈석산이 있는 지역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갈석산은 지금의 하북성 동북부의 창려 갈석에 있는 것으로 지금의 난하 하류 동부연안임을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이로써 진시대의 요동은 지금의 요하 동쪽이 아니라 난하 동북쪽이었다는 것이 분명하여졌다

 

그러면 서한 초에 중국에 속해 있었던 요동은 어느 지역이었는가?

 

“漢書(한서)” “張陳王周傳(장진왕주전)”에는 서한 초에 주발이 연왕 노관의 반란을 평정한 기록이 있는데 그 내용 가운데 당시의 요동군 주변의 상황을 전하는 것이 있다. 노관은 원래 서한 고조와 동향의 막역한 친구로써 서한왕조 개국공신 이었기 때문에 서한 고조 5년(기원전 195) 8월에 연왕에 봉해졌다. 그후 서한 왕실에 모반하였다가 고조 12년(기원전 195) 4월에 흉노로 도망한 것으로 되어있다. 주발은 이 반란을 평정하면서 노관을 추격하여 長城(장성)에까지 이르렀고 그 과정에서 상곡군 12현, 우북평 16현, 요동군 29현, 어양군 22현을 평정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서한은 고조때에 새로 장성을 축조하였거나 동북부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한 일이 없다. 오히려 흉노를 비롯한 주변의 이민족 들로부터 심한 압박을 받고 있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주발이 노관의 반란을 평정하면서 도달한 장성은 秦(진)장성을 뜻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평정된 요동군을 포함한 여러 군현은 진 장성의 안쪽에 있었을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 한서 지리지 요동군조를 보면 요동군은 진시대에 설치된 것으로 되어있다. 진제국의 요동은 앞에서 확인된바와 같이 지금의 난하 하류 동부연안으로 전국시대 연국의 요동과 동일한 지역이었는데 그 지역이 요동군 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서한시대의 요동군도 진시대의 요동군과 동일한 지역이었을 것인데 그것은 장성의 위치를 확인하면 자연히 밝혀질 것이다.

울티마툴레님의 댓글

이어서.
“史記(사기)” “匈奴列傳(흉노열전)”에 의하면 전국시대 말기에 연국은 東胡(동호)를 포함한 이민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朝陽(조양)으로부터 양평에까지 장성을 쌓고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 등의 군을 설치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淮南子(회남자)” “人間訓(인간훈)”에는 진제국이

서쪽으로는 유사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요수와 만나며 동쪽으로는 조선과 국경을 맺는 장성을 축조하였다

 

고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에서 진 장성의 東端(동단)은 바로 고조선의 서쪽 경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史記(사기)” “蒙恬列傳(몽념열전)”에 의하면 진제국이 중국을 통일한후 몽념에 의하여 진 장성이 축조되었는데 그것은 임조에서 시작되어 요동에 이르렀던 것으로되어있다. 따라서 앞에서 언급된 전국시대 말기에 축조된 연 장성은 그 東端(동단)이 양평에 이르렀고 진 장성의 동단은 요동 이었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 두 지점은 전연 다른 곳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같은 지역에 대한 다른 vtrl인가?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하여는 양평의 위치를 밝힐 필요가 있게 된다.

“사기”“흉노열전”의 연 장성 기록에 나오는 양평에 대해서 “史記索隱(사기색은)”은 주석하기를 삼국시대 吳國人(오국인)인 韋昭(위소)의 말을 인용하여 삼국시대의 요동군치소 라고 말하였을뿐 그 이상 양평의 위치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魏書(위서)” “地形志(지형지)” 영주 요동군조에는 北魏(북위)시대에 요동군에는 양평과 신창 두 개의 현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 그리고 양평현에 대한 주석에는 양평현은 서한과 동한을 거쳐 晉(진)시대에 이르기 까지 변화가 없었다가 그후 일시 폐지된 일이 있으나 북위의 효명제 정광 년간(서기 520~525)에 다시 설치 되었다고 하였다. 이로보아 양평의 위치는 북위시대까지 변화가 없었음을 알 수있다. 그러므로 서한시대부터 북위시대에 이르기 까지의 기록에서 양평의 위치를 확인해 낸다면 그곳이 바로 연 장성의 동단인 양평인 것이다.

그런데 “晉書(진서)” “地理志(지리지)” 平州條(평주조)를 보면 동한 말기에 공손도와 그의 아들 공손강 그리고 그의 손자 공손문예는 양평이 속해있는 요동에서 할거하였으며 魏國(위국)에서는 東夷校尉(동이교위)를 두어 양평에 거주하게 하고 요동, 창려, 현토, 대방, 낙랑 5군으로 나누어 평주로 삼았다가 후에 다시 유주로 합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양평을 “후한서”에서도 확인할수 있는데 同書(동서) “원소유표열전”에는 공손강에 대해서 그는 요동인이고 양평지역에 거주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양평은 요동에 있었다는 것이 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요동이 어느 지역 이었는지가 문제로 남는다. 지금의 요하 동쪽인가, 아니면 서한 초 이전에 요수로 불리어 졌던 지금의 난하 동쪽인가 하는 점이다

울티마툴레님의 댓글

이는  후한서의 이현의 주석이 해명하여 준다

唐시대의 이현은 “후한서” “원소유표열전”에 보이는 공손강의 거주지였던 양평에 대해서 주석하기를 “양평은 현인데 요동군에 속해 있었다 . 그 옛성이 지금의 평주 노령현 서남에 있다”고 하였다. 당시대의 평주 노령현은 동한시대의 비여현인데 비여현은 고죽성이 있었던 영지현과 접해 있었다. 따라서 비여현은 고죽국 지역이었던 지금의 난하 하류 동부연안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연 장성의 동단인 양평이 있었던 요동은 지금의 요하 동쪽이 아니라 난하의 동쪽을 지칭한 것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언급 하였듯이 “사기”“흉노열전”에서 사마천은 진 장성의 동단이 요동에 이르렀다고 말한바 있는데 이 요동도 지금의 요하 동쪽을 말한게 아니고 지금의 난하 동쪽을 지칭한 것이다. 중국을 통일한후 진국에 의해서 축조된 진 장성은 전국시대부터 있었던 여러 장성을 보수.연결하여 완성 시킨 것으로 그 동단 부분은 연 장성을 이용하였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연 장성의 동단을 양평, 진 장성의 동단을 요동이라고 표현 한 것은 전연 다른 지역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지역에 대한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요동은 넓은 지역명으로 표현된 것이고 양평은 구체적인 지명인 것이다. 이러한 필자의 견해는 “通典(통전)”의 기록이 뒷받침 하여 준다. 두우는 통전에서 한시대의 비여현에는 갈석산이 있었다고 말하고 진 장성은 이 갈석에서 시작 되었다고 하였다

결국 전국시대로부터 서한시대 초까지 주욱에 속해 있었던 요동은 지금의 난하 하류와 난하 중하류 서부연안에 있었던 令疵塞(영자새)를 기점으로 하여 난하 하류 동부연안에 있는 갈석산을 잇는 선 사이의 지역이었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 지역에 요동군이 설치 되었으며 갈석산으로부터 영자새로 이어지는 고조선과의 국경선상에 燕(연) 長城(장성)과 秦(진)長城(장성)이 위치 했었다는 것이 된다.

울티마툴레님의 댓글

이상이 윤내현교수가 저서에 논증한 요동과 장성의 위치고증입니다.

전 이 논증이 옳다고 생각되며 70년대 유물론적 실증주의로 무장한 중국학자들이 갈석산의 위치를 확증하며 내린 결론이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기원전108넌까지 요수는 난하이며 요동은 갈석산을 포함한 난하동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유적으로 봐도 저지역에 만리장성은 없으며 현재의 산해관이 고대부터 지금까지 장성의 동단이 됩니다. 논증된 것처럼 장성의 동단은 반드시 바다와 접해야 하기 때문이죠.

흥무대왕님의 댓글의 댓글

좋은 내용이네요. 
만리장성은 별도로 발제 부탁 드려요. 여기선 한군현만 논의하는게 좋을거 같아요.

흥무대왕님의 댓글의 댓글

댓글을 다시 살펴 보다가 생각난 게 있어서 추가합니다.

1. 조승완도 연 진개 침략(bc 300년경) 전의 연-조선 국경은 난하로 봅니다. 진개 침략 이후 국경이 요하로 바뀌었죠.
2. 조승완은 한군현 당시 패수(浿水)는 혼하, 패수(沛水)는 대청하로 봅니다.
3. '요동'이라는 명칭은 꼭 '요수'가 기준이 아닐수도 있습니다.
4. '요수'의 위치는 시대에 따라 달라집니다.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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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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