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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개전쟁의 경과 : 만번한의 위치 논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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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고대사신론. 윤내현


“위략”에 의하면 진개의 고조선 침략전쟁이 있은 후에 연국은 고조선과의 국경을 滿.番汗(만.번한)까지로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만.번한의 위치가 확인되면 국경선의 변화를 알수 있게 된다.



 만.번한의 위치는 “한서”“지리지”와 “수경주”의 기록을 통하여 입증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 요동군조”에는 文.番汗(문.번한)의 두 縣名(현명)이 보인다. 이 문.번한은 “위략”에 보이는 만.번한 이라는데 이론이 없는데, 동한시대에 이르면 文縣(문현)은 汶縣(문현)으로 바뀐다. 文. 汶. 滿(문.문. 만)은 중국의 동남부 지역에서 통용되는 吳音(오음)으로는 동일한 음이 된다. 古音(고음)이 주로 변경지역에서 오래 보존되어 내려온다는 점에서 생각해 볼때 이 세 문자는 고대에 동일한 음을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文縣(문현)과 番汗縣(번한현)이 항상 나란히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들은 연접되어 있었던 지역의 명칭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서 지리지 번한현”의 반고 주석에는 그곳에 패수가 있다고 하였으며 응소의 주석에는 汗水(한수)가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수경주 유수조”를 보면 유수의 지류로 汗水(한수)가 있다. 그런데 유수는 지금의 난하의 옛 명칭이므로 결국 패수와 한수는 난하의 지류였을 것임을 알게 된다. 따라서 만.번한은 지금의 난하 유역에 있었던 지명인 것이다.


반고와 응소는 패수와 한수의 흐르는 방향에 대해서 “塞(새) 밖으로 나와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앞에서 언급된 요수의 흐르는 방향과는 다르다. 요수는 동쪽 또는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 간다고 하였었다. 만약 고조선으로부터 위만조선에 이르기까지의 서쪽 경계였던 요수와 패수가 동일하게 지금의 난하였다면 그 흐르는 방향이 왜 다르게 기록되었는지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난하는 매우 긴 강 이다. 따라서 부분에 따라 흐르는 방향과 명칭이 다르게 되는데 요수의 경우는 그 하류 방향을 설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만.번한과 관계된 패수와 한수는 난하의 지류이므로 흐르는 방향이 다르게 되는 것이다. 현재 난하의 지류로써 서남으로 흐르는 강은 瀑河(폭하), 靑龍河(청룡하) 등이 있다.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한후 후퇴했음은 당시 연국의 정황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하여진다.. "위략“의 기록을 ”사기 조선열전“과 연결시켜 보면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한 시기는 연국의 전성기 였음을 알게된다. 연국의 전성기는 召王(소왕) 때로서 기원전 311년부터 기원전 279년 사이였으니 진개의 고조선 침략은 이 기간에 있었을 것이다. 연국은 기원전 284년에 秦國(진국), 楚國(초국), 趙國(조국), 魏國(위국), 韓國(한국) 등과 연합하여 강국인 齊國(제국)을 치고 70여개의 성과 제국의 도읍인 臨淄(임치)까지 점령 하였었다. 이 시기에 진개가 箕子國(기자국)과 고조선을 친 것인데 당시의 연국의 국력으로 보아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5년 후인 기원전 279년에는 연국의 소왕이 사망하고 혜왕이 즉위하였는데 혜왕은 용렬한 군주여서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그래서 연군은 제군에게 크게 패하고 철수 하여야만 했다. 그뿐만 아니라 기원전 273년에는 한국.위국.초국이 연합하여 연국을 정벌한 사태까지 일어났다 . 그후 연국은 멸망될 때까지 국력이 크게 쇠퇴되었다. 연국은 전성기를 맞은 것으로부터 불과 5년이 지난 후부터 국력이 크게 쇠퇴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조선을 친 진개만이 그 지역을 계속해서 확보하고 있었을 것으로는 생각할수 없다. 진개도 어쩔수 없이 후퇴했었을 것이다. “위략”의 기록에 진개가 기자국과 고조선의 땅 2천여 리를 빼앗았다고 말하고 그 다음에 국경을 만.번한으로 삼았다고 하였는데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만.번한은 지금의 난하 유역에 있었던 지명이었다. 즉 진개의 침략후에도 고조선과 연국의 국경은 그전과 크게 차이가 없이 지금의 난하 유역이었던 것이니, 이것은 진개가 후퇴 하였음을 입증하여 준다. 진개가 침략하였다는 2천여 리는 실제의 거리라기보다는 많은 땅을 침략하였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져야 할 것이다. 어떻든 고조선은 진개의 침략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오래지 않아서 영토는 거의 회복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알아두어야 할것은 전국시대에 연국만 일방적으로 고조선을 침략한 것이 아니라 고조선도 연국을 침공한 사실이 있다는 점이다. “鹽鐵論(염철론)”“備胡(비호)”편을 보면 고조선이 요동에있던 연국의 傲(오)(국경초소)를 넘어 연국의 동부지역을 탈취한 일이 있음을 전하고 있다. 요동에 있었던 연국의 傲(오)는 “사기 조선열전”에 나오는 요동외오를 지칭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동열전의 내용에 의하면 요동외오는 진개의 고조선 침략후에 설치되었다. 따라서 “염철론 비호”편의 기록은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한후에 고조선도 연국을 침공한 사실이 있음을 전하고 있다. 이로보아 고조선과 연국은 때때로 상호 침공이 있었으나 국경선에는 크게 변화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염철론”의 “伐功(벌공)”편에서는 “연국은 東胡(동호)를 물리치고 1천 리의 땅을 넓혔으며 요동을 지나 조선을 침공하였다. ”고 전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기 흉노열전”과 ‘위략“에 보이는 진개의 침략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만약 진개가 고조선의 영토를 침공하여 그것을 확보하고 있었다면 연국의 국경은 동쪽으로 크게 이동되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철론 험고“편에서는 연국의 국경은 碣石(갈석). 邪谷(사곡), 요수였다 고 밝히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진개의 전쟁이 일시적인 침략행위에 불과했고 다시 후퇴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실제로 전국시대에 연국시대에 연국보다는 제국이 강대국이었는데 제국은 지금의 산동성지역이었다. 그런데 종래의 통설처럼 연국이 압록강을 고조선과의 국경으로 삼고있었다면 연국은 제국의 두 배 정도의 대국 이어야 한다. 이것은 전국시대의 상황과 부합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사마천은 ‘사기“에서 ”연국은 북쪽으로 蠻貊(만맥)의 압력을 받았고, 안으로는 제국. 진국과 국경을 함께하여 강국들 사이에 끼어 있던 변방의 가장 약하고 작은 나라로서 여러번 멸망할 위험을 겪었다“고 말하여 연국을 약소국으로만 표현하고 

♥진개의 고조선 침략은 언급하지도 않았다♥는 점도 참고되어야 한다.


이상과 같은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전국시대에 진개의 고조선 침략으로 연국에 복속되었다는 진번과 조선은 지금의 난하 유역에 있었던 지명일 수밖에 없게된다. 그리고 “염철론 주진”편에서 언급된 진국이 중국을 통일한 후에 패수(지금의 난하)를 건너 토벌하였다는 조선도 그 기록이 옳다면 지금의 난하 동부연안에 있어야 한다. 진국은 중국을 통일한후 도망한 연왕 희를 붙잡기 위하여 장수 왕분의 인솔 아래 요동을 친 일이 있으며, 장수 蒙恬(몽념)의 지휘아래 요동에 장성을 축조한바 있다. 그러나 고조선을 크게 침공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진국이 토멸하였다는 조선은 국경지역에 있었던 지명일 수밖에 없게 된다.


지금까지 소개된 조선에 관한 기록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이 조선은 고조선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난하 유역에 있었던 지명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것이 일개 지명이었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기록들에 의하여 입증된다. “한서 지리지 낙랑군조”를 보면 낙랑군에 속해있던 25개의 현 가운데 조선현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 응소는 주석하기를 기자가 봉해졌던 곳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위서 지형지 평주 북평군조”를 보면 북평군에는 조선과 창신(신창?) 두 개의 현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현의 주석에는 “서한. 동한을 거쳐 진시대에 이르기까지는 낙랑군에 속해있다가 그후 폐지되었다. 북위의 연화 원년(서기 432)에 조선현의 거주민을 비여현으로 이주시키고 다시 설치하여 북평군에 속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따라서 조선현의 위치는 진시대까지는 변화가 없었다.

그러므로 진시대까지의 기록에서 조선현의 위치를 확인해 내면 그곳이 서한.동한 이래의 조선현의 위치가 된다. 그런데 “晉書(진서) 지리지 평주낙랑군조”를 보면 진시대의 낙랑군은 한시대에 설치한 것으로 되어 있고, 그 안에 朝鮮(조선), 屯有(둔유), 渾彌(혼미), 遂城(수성), 누방, 駟望(사망) 등 6개의 현이 있었는데 조선현은 기자가 봉해졌던 곳이고, 수성형은 秦(진)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하였다. 이 기록에서 조선현의 위치는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수성현은 진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하였으므로 그 위치가 확인된다. 앞에서 이미 확인된 바와 같이 진 장성의 동단은 지금의 난하 하류 동부연안에 있는 창려 갈석지역이었다, 그러므로 수성현의 위치는 이 지역이 된다. 


수성현이 창려 갈석 지역이었다면 같은 군에 속해있었던 조선현은 이 지역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어야 하고 수성현과 조선현을 포괄한 지역이 낙랑군 지역이 되어야 한다. 晉(진)시대의 낙랑군은 서한시대에 설치되었고 조선현도 그 위치가 서한시대로부터 진시대에 이르기까지 변화가 없었으므로 서한의 무제가 설치했던 漢四郡(한사군)은 이 지역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을 것임을 알게 된다

“漢書(한서)”“嚴朱吾丘主父徐嚴終王賈傳(엄주오구주부서엄종왕고전)” “賈捐傳(고연전)”에는 西漢(서한) 武帝(무제)의 업적을 말하면서 “동쪽으로 갈석을 지나 현토와 낙랑으로써 郡(군)을 삼았다” 고 했는데 이 표현은 매우 정확한 것이다.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갈석을 기준으로 하여 그 위치를 표현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된 北魏(북위) 延和(연화) 원년 (서기 432)에 移置(이치)된 조선현의 위치를 분명하게 해 주는 기록은 “隋書(수서)”“지리지 북평군조”에서 확인된다. 수시대의 북평군에는 노령현이 있었을 뿐인데 노령현에 대한 주석에는 옛날에 북평군을 설치하여 신창. 조선 두현을 統領(통령)하였는데 後齊(후제)(북제)시대에 이르러 조선현을 폐하고 신창현에 편입시켰으며 또 요서군을 폐하게 됨에 따라 해양현을 비여현에 편입시켜 통령하게 되었다. 개황 6년(서기 586)에는 또 비여현을 폐하여 신창에 편입시켰고, 개황 18년(서기 598)에는 노령현으로 개명 하였다. (중략) 長城(장성)이 있고 關官(관관)이 있고 臨渝宮(임유궁)이 있고 覆舟山(복주산)이 있고 갈석이 있고 玄水(현수), 盧水(노수), 溫水(온수), 閨水(규수), 龍鮮水(용선수), 巨梁水(거량수)가 있고 바다가 있다

고 하였다. 


이 기록에 나오는 현수,노수,용선수 등은 난하의 지류이며 비여현,장성,갈석 등이 난하의 하류 동부연안에 있었음은 앞에서 이미 확인된바 있다. 따라서 북위시대에 이치된 조선현도 난하 하류 동부연안에 있었는데 후에 노령현으로 편입되었음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앞에서 언급된 북위 연화 원년(서기 432)에 있었던 조선현의 비여현 지역에로의 이치는 조선현이 본래 있었던 곳으로부터 가까운 지역으로 이루어졌던 것임도 알 수 있다.


지금까지의 고찰에서 분명하여진 것은 난하 하류의 동부연안 즉 고조선의 서쪽변경에 조선이라는 지명이 있었는데 그로 말미암아 후에 그 지역에 조선현이 설치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문헌에서 조선에 관한 기록이 나타날 경우에는 그것이 고조선 전체에 관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분별해야 한다. 


여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수 있다. 고조선지역 안에 국명과 동일한 지명이 존재했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고대 중국의 예가 참고로 제시 될수 있다. 중국 최초의 국가였던 商王國(상왕국)의통 경우 국명과동일한 商(상)이라는 명칭의 邑(읍)이 존재했음이 甲骨文(갑골문)과 문헌의 기록에서 확인되며, 西周王國(서주왕국)에서는 정치적 중심지를 周(주)라 불렀는데 도읍인 鎬京(호경)을 宗周(종주), 東京(동경)인 洛邑(낙읍)을 成周(성주)라고 불러 그 명칭이 국명과 동일했음은 주지된 사실이다.


조선이라는 지명이 어떤 연유로 붙여졌는지는 분명하게 알 수가 없으나 적어도 고대 중국인들에게 그 지역이 고조선을 상징하는 지역으로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곳을 도읍지로 보기에는 너무 변방에 치우쳐 있고 고조선 세력이 집중되어 있던 곳으로 보기에는 그 규모가 노무 작다. “大明一統志(대명일통지)”에는 “조선성이 영평부 경내에 있는데 기자가 봉해졌던 곳으로 전해온다”고 하였는데, 명시대의 영평부에는 난주, 노령현, 천안현, 무녕현, 창려현, 낙정현 등이 속해 있었으며 난하 하류유역에 있었다. 이로보아 영평부에 있었던 조선성은 앞에서 언급된 조선에 있었던 성일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성은 아마도 고조선에서 국경지대에 방어용으로 축조했을 것인데 그 위치로 보아 令疵塞(영자새)를 의식했을 가능성이 있다. 큰 성이 있었고 그러했기 때문에 변경의 고조선인들이 그곳에 비교적 욵비해서 살았을 것인데, 중국인들의 눈에 그 지역이 고조선의 상징으로 보여 조선이라는 명칭이 붙여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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