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토론 분류

단군조선의 사회성격(4)

컨텐츠 정보

  • 474 조회
  • 0 추천
  • 0 비추천
  • 목록

본문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단계가 중국역사에서는 어느 시기에 출현하였는가?

이 점을 검증하기 위하여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인 갑골문의 내용을 살펴보는것이 순서일 것이다. 갑골문에 의하면 商王(상왕)은 종교적 권위와 정치적 권력을 함께 장악하고 스스로를 ‘一人(일인)’ 또는 ‘余一人(여일인)’이라고 칭하며 유아독존의 위치에서 신권전제통치를 행하였다.. 상왕국 말기로 오면서 그 성격이 변화되기는 하였지만 신권통치의 기초가 되었던것은 占卜(점복)행사와 제사의식이었다. 상왕은 점복을 통하여 신의 뜻을 파악하여 그것을 집행하고 상왕국을 구성하고 있던 여러 연맹부족의 수호신에 대한 제사를 통괄함으로써 종교적 권위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상왕 밑에는 대신.무관.문관 등으로 분류되는 20개가 넘는 관료가 있어서 상왕의 행정을 보좌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상시대에 이미 왕권이 확립되어 있었고 전문적인 지배계층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조직화된 중앙행정기구가 존재하여 집중회된 정부를 형성하였을 것임을 알게 하여 준다.

상왕국의 사회 구성원은 크게 나누어 지베귀족. 평민. 노예로 볼 수 있다. 지배귀족은 상왕을 우두머리로 하여 그 밑의 각급 관료와 多婦(다부). 多子(다자)등의 왕실귀족 그리고 ‘外服(외복)’에서 작위를 받은 侯(후).伯(백) 등이 있었는데 이들만이 방대한 관료기구와 강대한 군대및 종교적 권위를 장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위치에서 그들은 호사스러운 낭비생활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인데 발굴 결과에 의하면 재화가 소수의 귀족에게 집중되었던 현상을 보여 주고있다. 평민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지배귀족의 통치대상이었고 경제적으로도 지배귀족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빈한하였다. 노예는 주인이 사망하면 그를 위하여 순장되기도 하였고

동물과 함께 제물로 사용되기도 하는 등 생사권마저도 찾지 못한 채 처참한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의 사회가 심하게 계층화되어 있었음을 알게 한다.

상시대에는 정치적 전문 지배계층과 종교적 전문계층이 존재했음을 앞에서 언급한바 있는데 수공업 방면에서도 매우 전문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상시대의 청동기는 ‘司母戊鼎(사모무정)’과 같이 3백 명 이상의 집단노동과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것뿐만 아니라 종류가 다양하고 제품이 정교하고 우아하여 예술적 가치로도 세계 역사상 가장 우수하다는 것은 주지된 사실이다. 상시대는 製陶業(제도업)도 크게 발달하여 대표적인 것으로 硬陶(경도)와 瓷器(자기)의 출현은 제도기술의 진보를 보여주는 것이며 白陶(백도)는 일종의 진귀품으로 그릇모양의 문양에서 매우 높은 예술적 가치를 보여준다.

明器(명기)는 생산자가 자신의 필요를 위하여 만든 것이 아니었을 것이므로 이 방면의 전문 직업인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骨器(골기). 刻器(각기). 牙器(아기). 貝器(패기). 玉器(옥기). 漆器(칠기). 紡織品(방직품) 등도 매우 우수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정주와 안양 등지에서는 청동기. 도기. 골기. 각기 등의 제조장터와 사회신분과 직업에 따라 거주지역이 다른 도시구성이 확인 되었다. 이러한 자료는 당시의 사회가 매우 분업화되고 다양화되었으며 그것에 기초한 거주형태가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다. 여러 유적에서 발견된 대형의 건물터, 성터, 능묘와 악기 등도 그 분야의 전문 직업인이 있었을 것임을 알게 하여 준다.

상왕국에는 王族(왕족). 多子族(다자족). 五族(오족). 三族(삼족) 등의 중앙 상비군이 있었고 군대의 조직은 좌. 중. 우의 3師(사)로 편성되어 있었다.

갑골문에서는 刑具(형구)와 감옥에 관한 상형문자도 보이고, 상시대에 이미 墨刑(묵형). 비형. 宮刑(궁형). 刖刑(월형). 殺刑(살형) 등 후세의 소위 5刑(형)이 존재했음이 확인되었으며 1회에 수십 명 또는 1백여 명이 刖刑(월형)에 처해진 기록도 보인다. 刖刑(월형)을 받은 유골이 출토된 바 도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당시에 이미 정부가 무력을 독점하고 있었고 상당히 정비된 법제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며 그러한 법제회된 절차에 따라 형벌이 가해졌을 것임을 알게 하여 준다.

갑골문에 의하면 상왕국은 주변의 대립된 세력인 方國(방국)들과 잦은 전쟁을 하였는데 이러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필요에 따라서 한 부족 또는 여러 부족으로부터 3천, 5천 또는 1만 명을 징집하였다. 武丁(무정)시대에는 土方(토방). * 方( * 방)과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7월부터 9월까지 38일간에 모두 2만 3천여명을 징집한 기록도 보인다. 그리고 상왕국을 구성하고 있던 여러 연맹부족은 상왕실에 대한 병역의무와 더불어 貢納(공납)의 의무도 지고 있었는데 공납에 관한 기록은 갑골문에서 자주 확인된다. 공납은 상왕국을 유지하는 경제적 기초의 한 부분으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기록들은 상왕실에서는 필요에 따라서 전쟁을 수행하였고 병사를 징집하고 공납을 받아들였음을 알게 한다.

지금까지 언급된 것 외에도 상왕국의 사회구조에 있어서 계층화와 다양화를 보여주는 많은 자료가 있다. 그러나 앞에서 제시된 자료만으로도 두 가지의 분명한 결론에 도달 하게된다. 그것은 첫째로 상왕국은 근래에 인류학자들이 제시한 사회진화 개념상에 있어서의 국가단계에 이미 진입해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구미의 인류학자들이 제시한 고대 국가의 구조에 관한 이론이 동아시아지역에서도 적용될 수있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간과해서는 안될 점이 있다. 그것은 정치권력의 기초와 거주형태에 관한 것이다. 인류학자들은 지적하기를 국가단계에서는 혈연이나 친족에 의한 결속이 와해되어 정치적인 권력은 법에 기반을 두게 되고 거주형태는 직업의 전문화에 기초를 둔다고 하였다.

그런데, 다음에 자세히 확인되겠지만, 중국에서는 상시대는 물론이고 西周(서주)시대까지 정치권력을 포함한 사회구조가 혈연적인 조직에 기초하고 있었고 전문직업이나 거주형태도 혈연적집단을 토대로 하여 형성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점은 보편적인 고대국가 이론에 합당하지 않은 것으로서 혈연적인 공동체의식이 기초가 된 정치권력과 사회구조는 아시아 고대국가의 특징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펴본 상왕국에 관한 주된 자료는 갑골문이며 그것은 상왕국 후기의 기록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22대 무정 이후의 기록이다. 따라서 앞에서 학인된 국가단계의 사회는 상왕국 후기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상왕국 후기에는 이미 완벽한 국가단계에 도달하여 있었으므로 국가단계로의 진입은 그보다 올려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근래에 이리두문화가 발견되었는데 그 유적의 분포와 년대가 중국 최초의 왕조였다고 전하는 夏(하)의 전설지 및 연대와 일치하여 그것이 하문화일 가능성이 높아지자 중국의 전통적인 관념에 따라 고대국가의 기원을 하에서 찾으려는 견해가 제출되어 있다. 이리두문화의 유적에서는 궁궐로 보이는 대형의 건물터, 성터 등이 확인되어 강한 정치권력 집단이 출현하였을 것임을 알게 하여 주었고 묘제에서는 사회계층 분화와 빈부의차이를 보여 주었으며 청동기의 출현과 다양한 玉肌(옥기) 등은 전문 직업인이 존재하였음을 알게 하여 주었다.

그러나 이리두문화에서는 아직 당시의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그 사회의 구조, 정치권력의 성격, 법제의 유무 등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고 그것을 하문화로 단정한다는 것도 단정한다는 것도 무리이다. 그러므로 중국고대국가의 기원을 하에서 찾는 노력은 좀더 보류되어야 할 것이며 이리두문화를 추방사회의 말기 단계로 보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한편 상시대의 유적을 보면 중기와 후기의 도읍지는 발굴되었는데 전조의 도읍지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못한 상태에 있다. 따라서 상왕국 전기의 사회성격은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상왕국 중기의 도읍지였던 오는 지금의 정주로 추정되고 후기의 도읍지였던 殷(은)은 지금의 안양인데 정주에서는 상시대의 도시구조가 확인되었고 안양기는 앞에서 언급된 상왕국 후기에 해당된다. 정주에서 발견된 상시대의 토성은 전체의 길이가 약 7km에 이르고 북쪽의 성벽이 약간 구부러지긴 하였지만 대략 正方形(정방형)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1천 3백만여 일의 노동일을 요하는 거대한 것이었다. 이 성 안의 동북부에는 궁궐터가 있었고 성을 중심으로 하여 주변에는 청동기. 골각기. 도기 등의 제조장터가 있었다. 그리고 사회계층과 전문직업에 따라 거주지역이 구분된 도시구조가 확인되었다.

정주기, 즉 상시대 중기의 당시 기록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 도시구조가 매우 강한 정치권력의 출현, 사회계층의 형성과 전문직업의 분화, 그것에 기초한 거주형태를 보여 주고 있으므로 이 시기에 국가 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보아 크게 잘못이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중국에서의 고대국가 출현은 상시대 중기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상왕국의 국가구조는 어떠했으며 그것이 후에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살펴볼 시점에 와있다. 상왕국의 국가구조와 그후의 중국에서의 국가구조 변화는 고조선의 사회성격을 검증하는데 좋은 모형이 될 것이다. 상왕국의 국가구조는 邑(읍)을 기초로 하고 있었다. 갑골문에 邑字(읍자)는 일정한 영역을 뜻하는 사각형 밑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상시대의 읍이 경계가 있는 영역과 그 곳에 거주하는 사람을 요소로 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즉 거주지역을 뜻하는 것이다. 이 읍의 주위에는 경작지와 수렵지가 있었는데 그것을 포괄한 일정한 지역을 鄙(비)라고 불렀다.


갑골문에서는 ‘作邑(작읍)’에 관한 기록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읍의 건설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읍은 자연적으로 성장한 거주지역이라기보다는 인위적으로 건설되었을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의 鄙(비)에는 하나의 읍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20개 또는 30개의 읍이 있는 지역도 있었고 지금까지 갑골문에서 확인된 읍의 수는 1천여개에 달하는데 이것들이 모두 인위적으로 건설되었을 것으로 보는데는 무리가 있다. 邊境(변경)지대에 새로운 경작지를 개간하기 위하여 읍을 건설하는 경우와 같이 필요에 따라 읍이 건설되기도 하였겠지만 당시의 읍 가운데는 자연적으로 성장한 소규모의 취락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읍은 그 규모의 대소에 차이가 있었지만 오늘날의 개념으로는 부락 또는 취락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 읍은 부족사회 단계에서의 부락이 성장 또는 계승된 것과 그후에 새로 건설된 것 등 두 종류가 있었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읍 가운데는 大邑(대읍)이라고 불리어진 것이 있었다. 갑골문의 기록 가운데 한 예를 보면 唐(당)이라는 곳에 大邑(대읍)을 건설하였고, 이 읍은 唐邑(당읍)이라고 불리어졌다. 그리고 당으로부터 상왕실에 공물이 납부된 바 있고 당에서 제례의식이 거행된 바도 있다. 이로 보아 일정한 지역의 읍 가운데서 그 규모가 크고 종묘와 祭地(제지)가 있어서 그 지역의 정치와 신앙의 중심지였던 읍을 大邑(대읍)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읍에 그 지역을 다스리는 諸侯(제후)가 거주하였던 것이다. 읍은 상왕국 국가구조의 기본단위였는데 소읍은 종교적.정치적으로 대읍에 종속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대읍 가운데는 추방사회에서 부락연맹이 이루어 지면서 그 중심을 이루었던 부락이 성장 또는 계승된 것도 있었을 것이고 상왕국에서 필요에 의하여 새로 건설한 것도 있었을 것이다.

상왕국에 있어서 지방의 종교적.정치적 중심지가 대읍이었다고 한다면 상왕국 전체의 종교적.정치적 중심지는 어디였겠는가? 오늘날의 관념으로는 바로 상왕국의 도읍을 연상하겠지만 당시에는 종교적 중심지와 정치적 중심지가 분리되어 있었다. 이 두 곳을 포함한 지역이 상왕의 직할지인 ‘王畿(왕기)’여/t을 것인데 ‘도읍지역’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갑골문에는 商(상)이라는 지명이 자주 보이는데 그것은 항상 취락을 지칭하고 있다. 따라서 상은 읍명임을 알 수 있는데 실제로 商邑(상읍)으로도 불리어 졌다. 갑골문 연구가 초기단계에 있었던 시기에는 상을 당시 상왕국의 도읍이었던 지금의 안양을 지칭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그후 결론적으로 상은 당시의 도읍으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 있는 지금의 商邱(상구)지역이었음이 확인되었다. 商族(상족)은 당시의 도읍지가 아닌 다른 곳에 고정되어 있는 상읍에 대하여 그곳이 중심지라는 의미에서 中商(중상)이라고도 부르고 그것을 중심으로하여 다른 지역을 방위에 따라서 동토.서토.남토.북토라고 불렀다. 상족이 특별한 읍으로 생각하였던 상읍은 그들 조상의 도읍지 또는 거주지였던 곳으로 상왕실에서 가장 중요시하던 종묘. 위패. 왕위의 표징품 등을 그곳에 두고 특별한 제사의식과 많은 군대의식이 그곳에서 행하여졌던 것이다.

商(상)이 고정된 지명으로서 전기간을 통하여 이동할 수 없는 것이었다면 이동이 가능한 상왕국의 도읍지는 분명히 각각 다른 명칭을 가지고 있었을 것인데 현재로는 후대의 문헌에 의거하여 그것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 문헌에 의하면 상왕국의 도읍은 毫(호). 오. 相(상). 邢(형). 암. 殷(은) 등이다.

이 가운데 毫(호)만이 갑골문에서 학인될 뿐이고 殷(은)이나 다른 도읍명은 아직 학인되지 않았다. 단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상왕국의 마지막 도읍이었던 지금의 안양을 ‘玆邑(자읍)’ 즉 ‘이 읍’ 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안양에서는 고고학적인 발굴에 의하여 대규모의 상시대 유적과 유물이 발견.출토되어 상왕국 후기의 도읍지였던 殷(은)으로 확인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갑골문에서 보이는 대읍을 도읍에 대한 호칭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상왕국의 도읍도 대읍가운데 하나였기는 하겠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읍이 도읍만을 지칭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를 종합하여 볼때 상왕국의 국가구조는 거주지. 농경지. 수렵지로 구성된 읍이 기본단위가 되어 소읍.대읍.도읍.상읍이라고 하는 읍의 누층적인 관계에 기초를 두고 원추형을 이루고 있었다. 읍이라는 취락의 거주인들은 혈연적으로 결합된 집단인 씨족이나 부족이었으므로 읍의 층서관계는 바로 씨족이나 부족 사이의 층서관계를 형성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갑골문 연구가 초기단계에 있을때 邑字(읍자)를 성벽과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이에 근거하여 읍은 하나의 작은 단위국가였을 것으로 인식된 바가 있다. 그리고 상왕국은 이러한 작은 단위국가인 읍이 연맹을 이루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상왕국은 읍의 연맨체이기 때문에 읍제국가라고 불러야 한다는 가설이 제출되기에까지 이르렀다.

읍이 단위국가가 안었음은 앞에서 이미 확인된 바 있으므로 이 점은 재론을 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왕국을 그대로 읍제국가라고 부르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단지 그것이 갖는 의미는 소국인 읍의 연맹체가 아니라 취락인 읍이 기초가 된 읍의 누층적 층서관계로 형성된 국가라는 것으로 바뀌어져야 할 것이다.

상왕국을 멸망시키고 건립된 西周(서주)왕국은 혈연적인 宗法制(종법제)에 기초를 둔 分封(분봉)제도를 실시하였다. 주왕은 천하의 宗主(종주)로서 天子(천자)가 되어 서주왕국을 통치하였다. 천자의 자리는 嫡長子(적장자)에 의하여 계승되고 다른 아들들은 諸侯(제후)로 封(봉)하여졌다. 제후는 천자로부터 일정한 封地(봉지)를 받아 그 지역을 통치하였다. 제후의 자리는 적장자에 의하여 계승되고 다른 아들들은 卿(경). 大夫(대부)로 봉하여졌다. 경. 대부는 제후로부터 일정한 봉지를 받아 그 곳을 통치하였다. 경. 대부의 자리도 적장자에 의하여 계승되고 다른 아들들은 士(사)가 되었다. 士(사)에게는 食地(식지)가 주어졌다. 士(사)도 적장자에 의하여 계승되고 다른 아들들은 평민이 되었다. 주왕실과는 혈연관계가 없는 異族(이족)출신이 제후가 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들에게도 이러한 제도가 擬制化(의제화)되었다.

그런데 당시에 천자가 직접 지배하는 직할지를 ‘王畿(왕기)’라고 하였는데 그 안에는 宗周(鎬京)[종주(호경)]와 成周(洛邑)[성주(낙읍)]가 있었다.

宗周(종주)는 서주왕국의 도읍으로서 정치적 중심지였으며 宗廟(종묘)가 있어서 종교적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成周(성주)는 周族(주족)이 상왕국을 멸망시킨후 동방지역을 통치하기 위하여 건설된 새로운 정치적 중심지로서 서주왕국의 제2도읍이었다. 그리고 제후가 거주하는 읍을 國(국)이라고 하였고, 卿(경). 大夫(대부)가 거주하는 읍을 都(도)라고 하였으며 그 외의 일반적인 소읍은 鄙(비)라고 불리어졌다. 따라서 서주왕국의 국가구조는 鄙(비).都(도).國(국).成周(성주).宗周(종주)의 순서로 상시대보다 읍이 중층화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서주시대의 국가구조는 각 층 위의 읍에 대한 호칭이 바뀌었고 중층화되었을뿐 상시대의 그것을 계승하여 한층 구체화된 것이었다.

상.서주시대의 영토 가운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것은 읍의 집적이었다. 당시에는 읍과 읍 사이에는 경작지가 포함된 읍의 면적보다 훨씬 넓은 空地(공지)가 있었는데 사람도 거주하지 않고 개간이나 경작도 되지 않은 이러한 공지는 정치적.경제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상.서주왕국의 국가구조는 기본적으로 같은 기초위에 있었던 것으로 읍의 集積(집적)과 層序關係(층서관계)로 형성된 邑制國家(읍제국가)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국가구조와 질서는 春秋時代(춘추시대)를 거쳐 戰國時代(전국시대)에 이르는 사이에 와해되었다. 서주왕국이 몰락하고 춘추시대가 개시되면서 천자는 권위는 추락되었고, 패권을 장악한 제후가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으며 춘추 중기에 이르면 卿(경).大夫(대부)의 세력이 성장하여 제후국내에서의 실권을 장악하고 종국에는 제후를 능가하는 세력을 갖게 되었다.

한편 서주의 사회질서가 붕괴되어 감에 따라 경제구조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상.서주시대의 농민은 혈연적인 집단을 이루어 일정한 지역에 거주하며 그 사회적 신분은 세습되었다. 즉 농민과 그들이 거주하는 읍 그리고 그들의 신분은 일체화되어 자유로이 그들의 소속집단이나 거주지를 이틸할 수가 없었다. rfj나 서주 후기부터 사회가 혼란하여짐에 따라 이러한 농촌구조가 와해되기 시작하였고 춘추시대에 이르면 농가는 1家(가)1戶(호)가 단위가 되어 토지 소유주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農具(농구)와 농경기술의 발달은 종래의 사회구조를 붕괴시키는데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 춘추시대에 보급되기 시작한 철제농구는 전국시대에 이르러 보편화되었다. 철제농구의 보급은 종래의 空地(공지)를 개간할 수 있게 하였고 水利(수리).관개시설을 용이하게 하였으며 여기에다 농경기술면에서 牛耕(우경)의 확산은 생산을 크게 증대시켰다. 이렇게 되어 토지의 면적은 바로 경제력의 기초가 되었다. 이에 따라 춘추 중기 이후에는 토지 쟁탈전이 심각하게 나타나는데 이것이 전국시대에 이르면 列國(열국)간의 土地兼倂戰爭(토지겸병전쟁)으로 화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춘추시대에 읍제국가 구조가 붕괴되기 시작하여 전국시대에 이르면 영역이라는 개념이 중요시되어 領域(영역)국가가 출현하였다. 이러한 국가구조와 의식의 변화는 종국적으로 秦國(진국)에 의한 중국의 통일을 가져왔다.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319 / 1 페이지
번호
제목
이름
전체 319 / 1 페이지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