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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 요동교치설 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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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 중반에 낙랑군이 요동으로 교치되었다는 제 가설에 대해서 더 보강할만한 내용이 발견되어 글을 남깁니다.


1. 반론 중의 하나가 2~3세기 중국 전체 인구가 급격히 감소했기 때문에 낙랑·대방군의 인구 감소가 특이한 사항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고고학적으로 남한의 인구는 1~3세기에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습니다. 즉, 중국만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인구가 감소했을 뿐 한국고대사회는 인구가 오히려 증가했다는 것이고, 이는 낙랑·대방군의 황해도 주둔을 어렵게 만드는 한가지 요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입니다.


2. <진서>에 따르면 마한과 진한이 3세기 후반(280,281,286,287,289,290,277,278년)에 서진에 사신을 파견했습니다. 낙랑·대방군이 황해도에 있었다면 왜 마한과 진한은 낙랑·대방군을 통하지 않고 직접 서진과 교류를 하려 했을까요?


3. 고고학적으로 백제(伯濟)나 사로국이 3세기 후반에 주변 소국들을 통합하며 덩치를 키우기 시작했는데, 왜 하필 3세기 후반일까요? 어떤 계기가 있었을까요?


4.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봉상왕 5년 (296년) "왕이 고노자를 신성태수로 삼았는데 백성을 잘 다스려 위세와 명성이 있었으므로, 모용외가 다시 쳐들어오지 않았다." - 이 기록에 의하면 3세기 말에 고구려는 '태수'직책을 운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문헌과 유적에 남은 3세기 후엽 이후의 대방태수들은 고구려가 임명한 태수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이상의 항목들은 3세기중반 낙랑·대방군의 요동교치설을 지지하는 정황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심증만 갈 뿐 물증이 없다는 점이 약점이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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