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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 변천사와 평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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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전 글에서 고구려의 수도 변천사를 추적했는데, 동천왕의 평양성이 수도는 아니었지만 평양의 대성산성일 것이라 추정했습니다. 247년에 고구려가 과연 평양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있었는지 궁금하여, 낙랑군의 연혁을 조사 해 봤습니다. 




위 자료는 문헌과 논문을 참고하여 정리해 봤습니다. 상세 자료가 없는 것들은 추후 보완하겠습니다.


이렇게 정리 해 보니 역시나 또 여러가지 의문점이 생기네요.


1. 통설에서는 진번군 위치를 대방군과 동일한 황해도로 보고 있는데, 그게 맞을까요? 그렇다면 연나라가 황해도까지 진격해 왔다는 말일까요? - <사기> 처음 燕나라의 全盛期로부터 일찍이 眞番과 朝鮮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


2. 초원 4년 호구부에서 한서 지리지까지 이르는 47년 기간은 인구가 안정적으로 0.8%씩 증가한 셈인데, 추가적인 영토확장은 없었을까요?


3. 한서지리지와 후한서군국지 간의 인구는 30% 가량 줄었는데, 무슨 사건이 있었을까요? 그리고 호수는 그대로라는게 무슨 의미일까요? 사회 구성이 핵가족으로 변화한 걸까요?


일단 이 자료를 바탕으로 140년과 280년의 낙랑군(대방군 포함) 영역을 추정 해 봤습니다.






이 그림은 인구밀도를 기준으로 영역을 추정해 본 것입니다. 280년의 인구는 36,120명으로 추정하고 영역을 그려보면 낙랑군과 대방군은 재령강을 중심으로 한 황해도 지역 정도만 차지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럼 140년 대비 어느 시점에 280년 영역수준으로 축소되었는지, 고구려가 247년에 평양에 종묘를 옮길 수 있었을지 기록을 살펴 보겠습니다.


1. 삼국지 한전

[後漢의] 桓帝·靈帝 末期에는 韓과 濊가 강성하여 [漢의] 郡·縣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니, [郡縣의] 많은 백성들이 韓國으로 유입되었다. * 桓帝(A.D 146〜167) 靈帝(A.D. 167〜189)


2. 삼국지 한전

建安 연간(A.D.196~220; 百濟 肖古王 31~仇首王 7)에 公孫康이 屯有縣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帶方郡으로 만들고,


3. 삼국지 한전

景初 연간(A.D.237~239; 百濟 古爾王 4~6) 에 明帝가 몰래 帶方太守 劉昕과 樂浪太守 鮮于嗣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帶方·樂浪의] 두 郡을 평정하였다.


4.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19년

19년(245) 봄 3월에 동해(東海) 사람이 미녀를 바치므로 왕이 그를 후궁으로 받아들였다.


5. 삼국지 예전

正始 6년(A.D.245; 高句麗 東川王 19) 에 樂浪太守 劉茂와 帶方太守 弓遵은 [單單大]領 동쪽의 濊가 [고]구려에 복속하자, 군대를 일으켜 정벌하였는데, 不耐侯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하였다.


6.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 13년

〔13년(246)〕 가을 8월에 위(魏)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 삭방(朔方) 태수 왕준(王遵)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 왕이 빈틈을 타서 좌장(左將) 진충(眞忠)을 보내 낙랑의 변경 주민을 습격하여 빼앗으니 유무가 듣고 노하였다. 왕이 침략 당할 것을 염려하여 그 주민들을 돌려주었다.


7.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20년

〔20년(246)〕 겨울 10월에... 위(魏)의 장수가 이 말을 듣고 그 항복을 받으려 하였다. 유유가 식기에 칼을 감추고 앞으로 나아가 칼을 빼서 위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으니, 위군이 마침내 혼란해졌다. 왕이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빠르게 이들을 공격하니, 위군이 어지러워져서 싸우지 못하고 드디어 낙랑(樂浪)에서 퇴각하였다.


8. 삼국지 한전

部從事 吳林은 樂浪이 본래 韓國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辰韓 八國을 분할하여 樂浪에 넣으려 하였다. 그 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옮기면서 틀리게 설명하는 부분이 있어, 臣智과 韓人들이 모두 격분하여 帶方郡의 崎離營을 공격하였다. 이 때 [帶方]太守 弓遵과 樂浪太守 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遵은 전사하였으나 二郡은 마침내 韓을 滅하였다.


9.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21년

21년(247) 봄 2월에 왕이 환도성이 전란을 겪어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백성과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옮겼다.


10. 삼국지 왜인전

정시 8년(A.D.247), 태수 왕기(王頎)가 [帶方]임지에 도착했다. 왜 여왕 비미호와 구노국 남왕 비미궁호는 평소 불화했는데 재사, 오월 등을 군(郡)으로 보내 서로 공격하는 상황을 설명한 적이 있다.


11. 삼국지 예전

[正始] 8년(A.D.247; 高句麗 東川王 21)에는 [魏나라의] 조정에 와 조공하므로, 不耐濊王으로 봉하였다. [不耐濊王은] 백성들 사이에 섞여 살면서 계절마다 郡에 와서 朝謁하였다. 二郡에 戰役이 있어 租稅를 거둘 일이 있으면, [濊의 백성에게도] 供給케 하고 使役을 시켜 마치 [郡의] 백성처럼 취급하였다.



1번 기사를 보면 2세기 후반에 낙랑군의 인구가 줄어듬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때가 140년과 280년 간의 인구차이가 발생한 시점으로 보이는데, 정확히 말하면 26만명의 인구가 4만명으로 줄어들었으니 인구의 86%가 축소되어 군현으로 유지 자체가 어렵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2번 기사는 결국 공손연이 낙랑군을 포기하고 중심지를 대방군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개척했다고 표현했지만, 기존에 있던 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고, 인구는 오히려 줄었습니다. 다시 말해 204년경에 이미 대동강은 고구려의 영향력에 들어가 있었다고 보입니다.


3번 기사. 바다로 가야했다는 건 서안평에서 낙랑까지 가는 육로가 이미 폐쇄 되었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4번 기사를 예전에는 이해 못했는데, 5번 기사와 연결해서 보니 이제 알겠네요. 예가 고구려와 결혼동맹 또는 신속되었다는 의미로 보여집니다.


5~8번 기사는 고구려-위 전쟁을 그리고 있는데, 저는 5번의 불내후의 항복이나 8번의 기리영 전투가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고-위전쟁의 에피소드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7번의 "낙랑에서 퇴각했다"는 표현이 의미심장하다고 봅니다.


9번의 평양성 축성은 이미 평양의 낙랑군은 204년전에 쫓아냈고, 대동강과 재령강 사이에 있던 낙랑군까지 영향력 아래 두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10번 기사는 8번 기사가 언제 일어난 사건인지 설명 해 줍니다. 246년에 기존 태수 왕준이 죽고, 247년에 신임 태수 왕기가 대방에 도착합니다.


11번 기사는 이해 불가합니다. 춘추필법에 따른 뻥이 아닌가 생각하는데, 알 수 없습니다.



모든 상황을 고려 해 본 결과, 247년의 평양성(대성산성) 축성은 가능하다는 것이 제 추정입니다.




참고로 아래 그림은 후한서 예전을 참고하여 그려본 위만조선의 영역입니다.

   <후한서> 예전 - 예 및 옥저·고구려는 본디 모두가 [옛] 朝鮮의 지역이다.

위만조선의 지표유물이 뭘까요?






* 참고자료

<삼국사기>

<사기><후한서><삼국지>

장병진, 고구려의 대방 지역 진출과 영역화 과정, 고구려발해학회,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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