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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볼히니야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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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과거사 정리가 안된 사건,


"볼히니야 대학살"


"그런 불구대천의 원수에게 은혜를 베푼 폴란드"



볼히니야 대학살은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볼히니야 동갈리치아 지방에서 계속 자행되었고 그 결과 볼히니아에서 최소 4만에서 최대 6만, 동갈리치아에서 최소 3만에서 최대 4만의 폴란드인 및 유태인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성향(나치)의 반데라주의자들에게 학살당했다.


° 스테판 반데라: 우크라이나 네오나치의 시조이자 건국의 아버지로 칭송. 유대인 대학살과 폴란드인 대학살의 주동자.



독소불가침조약이 체결되고 그 결과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나누어 먹게 된다. 폴란드라는 구심점이 없어지자 우크라이나인들은 다시 한번 독립된 우크라이나를 꿈꿨고 소련 침공 준비를 하던 독일군 정보부 아프베어(Abwehr)는 스테판 반데라와 접촉하게 된다.



든든한 우군이 생긴 반데라는 과격 무장투쟁 노선을 본격적으로 펼치면서 폴란드인에 대한 우크라이나인들의 증오를 부추겼다. 독일군 역시 이에 편승하여 눈엣가시인 폴란드인들과 유태인들을 솎아내도록 말 잘 듣는 우크라이나인들 몇명을 뽑아 우크라이나 SS라 칭하여 무장시켰다. 결국 이 갈등이 폭발하여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우크라이나인들에 의한 자발적인 폴란드인 학살이 볼히니아와 동갈리치아 지역 전체를 덮치게 된다.



루츠크 등지에서 큰 규모의 학살이 벌어졌으며 실제로도 시골 특성상 화기보다도 냉병기가 더 많이 사용되어 더욱 잔혹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폴란드인이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하였고 태아를 꺼내 죽이기도 하였다. 폴란드 망명 정부는 이를 막아보려고 했지만 당시 자유군을 운영하기에도 벅찼던 망명 정부 입장으로서는 역부족이었다.  독일은 반데라와 간부들 몇명을 즉각 체포하여 악명 높은 부헨발트 수용소로 보내버렸고 우크라이나 국가이사회는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에 합병해버렸다.



지도부를 잃어버린 것 때문에 우크라이나 나치(민족주의자)들은 독일 역시 적으로 분류했고 동지 하나 없이 외로운 싸움을 이어나가는 한편 그 성향이 더 난폭해져 학살을 심화하게 된다. 폴란드와 독일 뿐만 아니라 소련 역시 마구잡이로 공격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장성인 니콜라이 바투틴이 독일군도 아니고 이들의 손에 암살당하기도 했다.



결국 주변 모두에게 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눈엣가시였으며 레벤스라움을 이루려는 나치 독일에게도, 반나치 투쟁을 벌이던 폴란드에게도 방해거리나 다름없었다. 나중에는 쿠르스크 전투 이후 승기를 제대로 잡은 소련군에게 이들 민족주의자들은 차츰 소탕당하였다.



스테판 반데라는 독일 패망 이후에도 쭉 서독에 거주하여 계속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소련 정부는 나치에 빌붙어 수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장성을 암살할 정도로 대전 내내 반소련 스탠스를 보였던 반데라주의자들을 절대 잊지 않았고, 결국 반데라는 1955년 뮌헨에서 KGB 요원 보그단 스타신스키(91세. 아직도 살아있음.)에게 추적당해 살해당한다.  



현재도 반데라의 뜻을 이어간다고 주장하는 단체가 바로 돈바스 전쟁의 큰 축인 스보보다와 프라비 섹토르이다. 이들은 아직도 나치식 경례를 하는 등 나치를 추종하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현재의 젤렌스키 정부로 이어져오고 있다.


현재 200만명의 우크라이나 난민을 수용하고,


그들에게 의식주와 일자리를 제공하는 폴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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