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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Re: Re: Re: 벌지 대전투 - 겨울 지옥 (스압)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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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통 전투 중에 아르덴 숲 속에 101 공수 부대 바주카 사수들)

 


12월 23일 독일군은 바스통과 아르덴 숲을 보유하고 있던 킹 타이거와 타이거 탱크들을 앞세워서 


무참하게 짓밟아버리기로 작정하고 작전을 개시합니다. 


하지만 총 공세 개시 이후 무려 일주일이 지나는 동안 악천후와 짙은 안개는 점점 겉혀 지고 연합군이 그렇게도 절실히 필요했던 


바스통에 대한 공중 보급과 독일 기갑부대와 보병들에 대한 공중 폭격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P-47 썬더볼트 전폭기들은 지상에 훤하게 드러나 버린 독일 최정예 기갑부대들을 로켓탄과 기관포 사격으로 파괴해버렸고 


바스통을 탱크로 짓밟아버리겠다는 독일 측의 최후 작전은 수포로 돌아가 버립니다.


 

이제 바스통은 더 이상 독일군에게 포위된 풍전등화의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바스통 마을 폐허 속에 빽빽히 들어찬 부상병들을 위해서 공중 투하된 의약품들 뿐만 아니라 글라이더에 타고 도착한 


긴급 의료팀까지 지원되어 불과 하루 전까지 끔찍한 얼음 속에 지옥이었던 이 마을은 희망의 불씨가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IV.히틀러의 독선이 모든 것을 잃게 만들었다.



독일군 총 공세의 총사령관인 모델 장군은 생 비트의 점령을 실패 한데 이어서 바스통의 점령도 물 건너가게 되자 


이번 작전은 수정하거나 아니면 취소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베를린에 있는 히틀러에게 작전 취소 대신 주력 부대를 둘로 나누어 남과 북으로 우회하여 뮤즈강 동부에 도착한 후에


아르덴 지역에 연합군 전체를 포위하고 공격하는 작전으로 수정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이미 광기에 가득 찬 히틀러는 일언지하에 묵살해버리고 "무조건 바스통을 점령하라"고 다시 한번 명령하게 됩니다.




결국 모델 장군은 실패할  공격임을 뻔히 알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병력을 총동원하여 바스통을 공격하였으나


12월 26일 바스통에 마침내 도착한 패튼의 주력 부대까지 반격에 가담하여 이제는 독일군이 패퇴 하는 상황이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여기서 독일군이 비록 패퇴 하더라도 얼마나 무서운 군대인 가는 퇴각하는 독일군이 


추격하는 연합군에게 퍼부운 공격으로 연합군 병력은 공격을 받던 기간 동안에 발생했던 사상자 숫자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피해를 입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겪게 됩니다 


비록 상황이 불리하게 되어 퇴각하는 독일군들이었지만 그들의 전투력이 상실된 것이 아니고 


다만 보급과 숫적 열세로 인한 퇴각이었던 탓에 공격력은 여전히 예리하게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연합군측 보고에 따르면 신형 킹 타이거 탱크의 가공할 위력은 추격군이라고 생각했던 패튼 휘하의 셔먼 탱크들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습니다. 


또한 킹 타이거 못지않은 위력을 여전히 보유했던 타이거 탱크는 물론이고 이제는 독일 기갑 전력에 주력으로써 위치를 잡게 되었던 


판터 탱크의 위력도 연합군 측에서 내세울 상대로는 셔먼 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수많은 셔먼 탱크들을 아르덴 숲 속과 벌판에서 


희생 시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독일 탱크들의 연료 부족과 보급의 단절은 아무리 뛰어난 성능이라도 연합군 기갑부대와의 대결에서 밀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정확히 독일의 총 공세가 시작 한지 딱 1달 하고 하루가 지난 1945년 1월 16일 전선은 총 공세 이전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리고 아이젠하워 총사령관은 하루 속히 베를린을 점령하여 히틀러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만이 최선의 전략임을 인식하고 


총 공세를 시작하게 됩니다.


 

히틀러는 비록 승리는 할 수 없었어도 몇 개월은 더 버틸 수 있었을 전력을 벌지 전투에서 


한순간에 무모한 전략을 세워서 쏟아 붓는 바람에 그에게 생명을 바쳐 충성을 다하는 무장 친위대 기갑부대 병력을 포함해서 


무려 25만명의 전력의 1/3에  가까운 8만명의 사상자를 기록하면서 최악의 결과를 거두게 됩니다. 


비록 벌지 전투에 승리자는 연합군측이었지만 아래 위키백과에 나와있듯이 사상자 규모는 연합군이 더 많았습니다.












결국 1월 23일에 독일 최고 사령부는 작전 취소를 결정하였고 1월 27일 벌지 전투는 사실상 중지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전투의 중지는 겉잡을 수 없는 독일군의 패퇴를 의미했고 연합군의 총 공세는



더 이상 독일군이 공격 다운 공격을 취할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벌지 전투는 조지 패튼 장군을 다시 한번 2차 대전 최고의 영웅으로 명예 회복을 시켜준 전투였습니다. 


그와 함께 비록 전투에서 승리는 하였지만 오마 브래들리 장군은 아이젠하워 총사령관에게 지울 수 없는 실망을 안겨준 전투였습니다.


아무리 승리하였다고 해도 어느 누구도 브래들리의 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비록 48시간의 약속은 지키지 못했지만 바스통에 고립된 101 공수부대를 구출하기 위해서 눈보라를 뚫고 달려온 


패튼의 제3군 소속 최정예 기갑부대들과 셔먼 탱크의 전공은 제3 제국의 패망을 앞당긴 결전의 영웅으로써 기록되게 됩니다.

 


한편 이번 독일의 총 공세를 진두 지휘했던 나치 독일의 명장 모델 장군은 뼈아픈 패전을 겪고 3개월 후인 


1945년 4월 말에 "독일의 원수는 절대 항복하지 않는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1945년 쿠벨바켄을 타고 후퇴 중인 발터 모델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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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명
    날으는 황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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