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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지 대전투 - 겨울 지옥 (스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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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지 대전투는 1944년 12월 중순에서 1945년 1월 말까지 한겨울에 살인적인


추위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한 연합군이 기적과 같은 승리를 쟁취한 사건입니다.


사진은 최악의 전쟁터였던 프랑스 바스통 전투에 투입된 미군 M4 셔먼 탱크)


 

 



(엉터리 고증으로 실망스러웠던 대표적인 할리우드 영화였지만 "벌지 대 전투"(1965년작). 


영화 자체는 "사상 최대의 작전"(1962년작)이나 "멀고 먼 다리"(1977년작)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엉성한 전쟁 영화였지만 


실제 벌지 전투는 제 3 제국 멸망에 앞서서 "최후의 결전"이나 마찬가지인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 )

 

"벌지" 전투라는 사건을 2차 대전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벌지"(Bulge)라는 뜻은 "주머니"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몬테카시노 전투"라든가 "엘 알라메인 전투"처럼 "벌지"가 지명이라고 생각했던 


저는 오래 전에 의미를 알고 나서 당황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럼 난데없이 "주머니"라는 단어가 여기서 왜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인가?

 

실제 독일군이 전선의 일부를 진격해서 마치 그 지역이 주머니처럼 툭 튀어나왔다고 해서 당시 미군들이 붙인 이름입니다. 


양키 나름대로 재미있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동부 전선의 최대 규모의 전차 전이었던 "쿠르스크 전투"도 전선에서 툭 튀어나온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지만 


소련이나 독일 양쪽 모두 "주머니"라는 표현을 생각해내는 위트는 없는 인간들이었지요.^^)



 

 


 (벌지 전투의 지도 - 전선에서 서쪽으로 툭 튀어나온 부분을 보면 "주머니"의 의미가 이해가 갈 겁니다.)

 

이번 글은 벌지 전투를 실제 전투 상황 지도를 보면서 전개를 함께 따라가 보고 져 합니다. 


우리가 마치 연합군 또는 독일군 사령부의 상황실에서 숨 막히는 전투 상황을 함께 보자는 얘기이지요. 


중고등 학교 때 인문 지리, 국토 지리 배우면서 지도를 보면 울렁증이 있었던 분들도 


이것은 우리의 "FUN"을 위한 지도 읽기 이므로 괜시리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 벌지 전투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보겠습니다.


 

이번 글부터 아무리 긴 소재라도 단편의 글로 끝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글들이 여러 개로 나뉘니까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오늘 글의 목차를 간단히 만들어봤습니다.

 


I.      히틀러 최후의 반격 계획을 세우다.


II.    총 공세 시작하다! (12/16~12/20)


III.  바스통 결전 (101 공수 부대의 전설)


IV.   히틀러의 독선이 모든 것을 잃게 만들었다.

 

 





I.히틀러 최후의 반격 계획을 세우다.



 



(일단 벌지 전투가 벌어진 지역이 어디 쯤 인지 감을 잡고 갑시다. 


지도에서 독일과 벨기에 국경에서 연합군과 독일군이 교착 상태


(벌지 전투 시작 직전인 1944년 12월 초)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아이젠하워 장군이나 몽고메리 장군과 같은 연합군 수뇌부들은 


크리스마스 파티는 베를린에서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자신감은 마켓 가든 작전이라는 2차 대전 최악의 작전을 감행하게 되고 앞에 제 글에서 설명 했듯이 


9월에 시작한 이 작전은 엄청난 연합군 병사들의 희생을 댓가로 치루게 됩니다. 


노르망디 상륙부터 불과 3개월 사이에 너무나 빨리 진격해온 연합군들에게 엄청나게 길어져 버린 보급 루트가 


가장 심각한 문제점으로 부각되자 성급해진 몽고메리가 앞장서서 계획한 마켓 가든 작전의 실패는 


전선을 교착 상태로 바꿔버렸고 연합군은 일단 보급 문제부터 확고히 해결해 놓고 그다음을 생각하기로 생각을 바꿉니다.




 

 



(1944년 9월 마켓 가든 작전 중에 독일군의 공격에 항복한 영국 공수 부대원들이부상당한 동료를 부축 하고 투항하는 모습, 


불과 3개월 전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했던 연합군은 공명심에 가득 찬 몽고메리와 


이를 용인한아이젠하워 사령관을 포함한 군 수뇌부들의 오판으로 무모한 작전을 강행하여


수많은 연합군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

 

 

한편 동부 전선에서도 소련군의 바그라티온 작전이 폴란드 동부에서 끝난 후에 휴식을 취하자는 의견이 채택되었습니다. 


1939년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이듬해 프랑스까지 2개월도 안되는 시간에 점령해버리고 


거의 대부분의 유럽 대륙을 손아귀에 쥐었다고 생각했던 아돌프 히틀러는 그 당시에 독일 본토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점령지들을 


동쪽에서는 소련에게 서쪽에서는 서방 연합군에게 다 빼앗겨 버리고 이제는 자신의 안위조차 위험해진 상황에 처하게 되자 


이런 소련군과 서방 연합군들의 휴식 상태가 전세를 역전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판단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1940년 프랑스에 대한 전격전 승리를 재현하듯이  벨기에 아르덴 지방에 삼림 지대를 기갑부대로 돌파하여 


파죽지세로 앤트워프까지 진격한 후에 서부 전선 북쪽의 연합군을 포위하여 치명타를 가한다는 것이 


새로운 진격 작전의 주요 내용이었습니다. 


히틀러 휘하에 룬트슈테트 장군과 발터 모델 장군과 같은 유능한 지휘관들은 이런 히틀러의 계획이 무모하다고 반대하였지만 


이미 광기에 휩싸인 히틀러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히틀러는 자신의 이런 작전이 성공하여 서부 전선이 장기 교착 상태로 들어가면 서방 연합군과의 강화를 얻어낼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러면 전력을 동부 전선에 소련 붉은 군대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황당한 망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치 독일의 패망에 큰 공헌을 한 것은 바로 아돌프 히틀러가 너무 군사 작전에깊이 관여하고 결정권을 행사했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훨씬 우수한 전술 지식과 판단력을 갖고 있었던 장군들이 그의 주위에 수두룩 했지만 그 우수한 인력들은


1차 대전 하사관 출신의 미치광이 총통의 결정에 토를 달 수 없었습니다.)


 

히틀러의 반격 작전이 시작되는 시기는 벌지 전투의 무대가 될 아르덴 숲에 두껍게 눈이 쌓이고 혹독한 추위가 닥치는 겨울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아르덴 숲은 짙은 안개가 끼어서 공중 관측이 어려운 날씨가 지속되었습니다. 


당시 루프트바페의 위세는 꺾인지 오래 였고 연합군 쪽으로 제공권이 넘어온 상황에서 


독일군의 움직임이 공중에서 연합군 정찰기에 의해 샅샅이 관측된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안개 덕분에 독일군은 이 반격 작전을 위해서 투입할 정예 20개 사단 병력과 특히 이 시기에 전장에 투입되게 되는 


킹 타이거 탱크가 연합군 공군기에 의한 공격의 위험이 크게 줄었던 것입니다.


 

 


(국민 척탄병(Volksgrenadier)는 1944년 여름에 16세~60세까지 아직 군대에 입대하지 않았던 병력들과


해군과 공군에서 남아도는 병사들, 그리고 부상병들까지 긁어 모아서 조직하였던 나치의 마지막 발악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개인 화기는 타 부대보다 훨씬 자동화되어 전쟁 말기에 개발된 StG 44 돌격 소총이 상당수 지급되었습니다. 


당시 볼트 액션 방식의 소총(Kar98K) 아니면 기관단총(MP40)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하는 상황에서 


스위치 작동 만으로 한정의 총이 자동 소총과 단발 소총 기능을 동시에 구현할 수 있는 StG 44 돌격 소총은 


엄청난 총기의 혁명이었습니다.)

 



(위에 총이 나치 독일의 혁신적인 돌격 소총 "StG 44"입니다.


관련자료

  • 서명
    날으는 황웅
댓글 2

잠수함님의 댓글

이 바스통 전투에서
 그 전차로 유명한 에이브람스 가 탄생합니다

아들 에이브람스는 한국 주한미군 사령관으로 역임하기도 했었죠

아버지는 2차대전 전쟁영웅

그래서 아버지 이름 따서 미국 제식 전차 에이브람스가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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