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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지 대전투 - 겨울 지옥 (스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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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총이 나치 독일의 혁신적인 돌격 소총 "StG 44"입니다.


밑에 총은 소련에서 전후에 개발한 AG 47입니다. 


비교해보면 대충 감이 잡히겠지만.... 


AG47의 개발자인 칼라쉬니코프는 자기가 이 총을 개발할 때 


StG 44에 대해서 몰랐다고 잡아 떼지만 나치 독일의 StG 44가 현대 개인화기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의 M-16과 소련의 AG47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척탄병"의 어원은 무엇일까요? 18세기 프로이센 왕국 군대에는 


전문적인 초기 형태의 수류탄을 던지는 병사들을 척탄병이라고 불렀습니다.


수류탄을 멀리 던지려면 일반 병사들보다 훨씬 체격이 크고 힘이 있어야 했는데 이런 척탄병들은 


좀 더 튀는 색깔과 디자인의 군복을 입었고 나름 엄청 자부심이 강한 조직이었습니다. 


여기에 착안해서 히믈러가 조직한 예비군 부대의 이름을 척탄병이라 명명하였는데 


특별히 수류탄 투척 전문의 의미가 아니라 18세기 강력한 프로이센 제국의 환상을 


국민들에게 주입하자는 얄팍한 의도였습니다.)

 




다시 벌지 전투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하지만 히틀러의 반격 작전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독일군 내부의 상황이었습니다. 


동부 전선에서 워낙 큰 타격을 입은 탓에 불과 1~2년 전에 최정예 병력으로 구성되었던 


나치 독일의 지상군은 엄청나게 약화되어 버린 상황이었습니다. 


20개 사단이 투입되었지만 대부분의 부대들은 정원을 채우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원래 9개 대대가 1개 사단으로 구성되었던 원칙이 극심한 병력 부족으로 이 당시에 6개 대대 1개 사단으로 편법 운영중이었습니다.) 


그해 여름에 예비군 사령관 하인리히 히믈러(친위대 사령관으로 유명하고 유태인 학살에 주범이었던 바로 그 악마 같은 인간) 


휘하에 조직된 국민 척탄병 사단까지 투입 시키면서 시급히 병력을 채우게 됩니다. 


게다가 무기와 식량의 부족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고 특히 연료의 부족은 기갑부대에게 


상대방 탱크보다 더 위협적인 요인이 되고 있었습니다. 


결국 작전 계획에서 조차 연합군의 보급 기지를 점령하여 부족한 연료와 보급품을 해결한다는 내용이 들어갈 정도였고 


불과 몇 개월 전에 연합군의 마켓 가든 작전 못지않게 무모한 작전이었습니다.


 

연합군 수뇌부는 마켓 가든 작전의 대 실패 이후에 독일군이 반격 작전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있었으나 


독일군의 군사력에 대해서 과소 평가를 하고 있어서 심각하게 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아르덴 지방의 울창한 삼림과 산악 지형은 아직 까지 독일 지상군의 가장 위협적인 존재인 기갑부대가 


쉽게 진격해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방심하고 있었습니다.

 

 




 (실제 한겨울에 아르덴 숲의 모습.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들과 겹겹이 쌓인 눈, 살인적인 추위는


이곳에서 독일군의 공격에 버티게 되는 연합군 병사들에게는 가혹하기 그지없는 환경이었습니다.)



 

마켓 가든 작전의 실패로 연합군의 예봉을 꺾어버린 9월 중순에 히틀러와 군 수뇌부는 아르덴 숲을 통과하여 공격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주력은 서쪽으로 진격하여 뮤즈 강까지 도착한 후에 북서쪽에 앤트워프와 브뤼셀로 진격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여기서 연합군이 예측 했듯이 험란한 지형을 빠른 속도로 이동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어떻게든 뮤즈강 도하에 성공하기만 하면 그다음부터는 지형 조건이 훨씬 개선되어 해안까지 도달이 가능할 것이라 판단하였습니다.

 


연합군은 왜 방심하였는가?


 

위에 아르덴 숲의 사진을 보면 나치 독일의 탱크들이 이런 숲속을 통과하여 진격하려면 


결국 숲속에 어느 정도 길이 다듬어진 도로를 따라 1렬로 진격할 수 밖에 없다고 연합군은 속단 했습니다. 


가령 200대 정도의 탱크들이 1렬로 이동하는 경우 그 거리는 약 15km까지 늘어서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맨 앞에 탱크가 공습으로 치명타를 받고 멈춰버리면 그 긴 행렬은 오도 가도 못하고 발이 묶여버리게 됩니다. 


그다음에 벌어지는 상황은 전폭기 조종사들이 양손을 묶어버린 상대를 마음 놓고 패듯이 "학살"이나 다름없는 공격을 하는 셈입니다. 


피해 탱크의 숫자는 공격하는 전폭기들이 갖고 있는 탄약과 폭탄의 숫자에 달려있는 상황이 되는 것이지요.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과연 나치 독일이 기습적인 반격을 아르덴 숲속을 통과하면서 감행할 수 있겠는가??




 

 

 


(벌지 전투의 무대가 되는 벨기에와 프랑스에 걸쳐져 있는 아르덴 지역의 지도,


위키백과에 나온 작전 지도에 설명을 한국어로 바꿔 놨습니다, 


즉 독일 총 공세일(12/16일) 직전 전선이 불과 며칠 사이에 어떻게 바뀌는지 쉽게 알 수 있는 지도입니다. 


앞으로 이 지도를 가지고 이야기를 전개해나가겠습니다.)



 

이 작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첫째, 적이 상상도 못하는 기습 공격으로 허를 찔러야 한다는 것이었고,

둘째, 악천후로 적의 공군력이 공격은 물론이고 정찰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의 짙은 안개와 폭설이 내리는 조건에서 공격을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째, 전광석화와 같이 빠른 스피드로 전진하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연합군에 비교하여 병력과 보급 모두 열세였던 독일군의 반격은 시간이 조금이라도 지체 되는 경우에 


연합군이 전열이 정비하여 반격을 개시하도록 허용한다면 참담한 패배는 불을 보듯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연합군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만들어버리고 속전 속결로 마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작전 수립의 리더였던 모델 장군은 작전 개시 후에 뮤즈 강에 도착할 때까지 4 일을 넘으면 안된다고 못 박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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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명
    날으는 황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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